주님의 문지기/앤드류 머레이

하늘문을 여는 기도(2. 기도하지 않는 이유)

작은둥지 2009. 5. 19. 23:53

기도는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쇠이다.

기도는 강한 군대들을 이기며, 마귀의 계교를 드러낸다. 

- 윌리암 거널 

 

 

2. 기도하지 않는 이유

 

 장로들의 기도 모임에서 한 장로님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불신앙 때문입니까?" 그러자 다른 장로님이 대신 대답하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의 불신앙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대답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기 때문이다.

 

 기도 모임을 마친 후, 한 장로님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성령을 좇아 기도하기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육신을 좇아 살기 일쑤이니 참으로 슬플 뿐입니다. 그래서 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어떤 병든 사람이 낫기 원한다면 우선 질병의 근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질병이든 근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회복을 위한 첫 단계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한 채 잘못된 원인이나 부차적인 문제에 집착한다면 완전히 나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환자인 우리는 자신이 영적으로 무감각하며, 축복의 장소가 되는 자신만의 기도 공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그 근본 원인을 알아보자.

 

 성경은 우리 크리스천에게 두 가지 상태가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육신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충돌하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땅에는 성령으로 거듭났으며 새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좇지 않고 여전히 육신의 길을 좇아 사는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렇게 책망하였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갈라디아 교인들은 육신의 소욕을 좇아 행했다. 그들은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며, 우리를 죄의 길로 이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육신을 좇아 행하면 음행, 살인, 술 취함과 같은 중대한 죄 뿐 아니라 분냄, 다툼, 당 짓는 것과 같은 사소한 죄도 짓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같이 권면하였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

 

 우리는 새 생명의 창조자이며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고 주장하시는 성령을 경외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역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굴복하는 육신의 뿌리 깊은 죄성과 불경스러움에 대해 무지하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롬8:3).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우리의 육신은 개선되거나 거룩해 질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 방법이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6)'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날마다 우리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육신의 뿌리 깊은 죄성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 진지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같이 고백하였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이 말을 깨닫는 사람은 이렇게 부르짖을 것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3~24).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는 정녕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게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계심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이 영적인 삶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내 맡기는 자들에게 영적인 삶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죄의 깊은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의 육신은 기도하는 것은 괜찮으며, 기도는 종교 행위이고, 기도함으로 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자세히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사로잡혀 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육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여전히 육신적인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따를 의향도, 힘도 없다. 그는 형식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만족한다. 마침내 영안이 열려 능력있는 기도를 가로막는 가장 큰 대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육신임을 깨달을 때까지 그는 은밀한 기도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

 

 나는 교역자 협의회에서 기도에 대해 얘기하면서 육신의 적대감이 기도하지 않는 원인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자 어떤 목사의 부인이 자기가 생각하기엔 나의 어조가 너무 강한 것 같다고 얘기하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실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연약한 육신에 관해 설명한 후에 성령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육신의 은밀한 공작임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보여 주었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으며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다. 그러나 타락 후 그는 즉시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생겨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다. 이 불치의 반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성이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 다음날, 목사 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안을 열어 주셨다고 내게 말하였다. 그녀는 육신의 반감과 저항의 자신의 기도 생활을 가로막은 은밀한 훼방꾼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성경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육신의 적대감 때문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크리스천이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역사에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신의 종노릇하고 있는 셈이다. 육신의 삶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불쑥 화를 냄

 * 종종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미워함

 *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과식하며 음주를 즐김

 *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뜻, 명예, 지혜, 권세를 좇으며 세상 쾌락을 탐함.

 

 이 모든 것은 육신을 좇는 삶이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있는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우리가운데 시기나 분쟁이 있으면 우리는 아직 육신에 속한 자이다. 이 말씀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하나님안에서 완전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라.

"여기서 내가 기도하지 않는 까닭과 영적으로 무력한 이유를 발견하였는가? 나는 성령안에 살고 있다. 나는 거듭났지만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육신의 삶은 능력있는 기도를 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육신의 삶은 부끄럽게도 내가 기도하지 않는 근본원인이다."

 

싸움터의 한복판

 

 교역자 협의회에서 하나님 나라와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과 관련해 자주 거론하는 '전략적 요충지(strategic position)'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지휘관은 적과 맞서 싸울 장소를 택할 때 전략적 요충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워터루 전쟁터에는 웰링턴 장군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 요소를 판단한 농가가 한 채 있었다. 웰링턴 장군은 그 농가를 차지하기 위해 병사들을 대거 투입하였다. 그 결과, 그가 예상한 대로 나폴레옹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성도와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의 기도 장소는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사단은 크리스천들, 특히 목회자들이 기도를 무시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총동원한다. 사단은 설교, 예배, 심방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목회자가 기도를 무시하는 한 그 모든 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왕국에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교회가 기도로 무장하고 주님의 군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을 때 어둠의 권세는 깨어지고 뭇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 기도에 의지하여야 한다. 교역자 협의회 기간 동안 나는 '크리스천(The Christian)'이라는 잡지에서 다음 글을 발견하여 감명 깊게 읽었다.

 

 어디선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은 크리스천이고, 다른 사람은 무저갱의 사자이다. 무저갱의 사자는 크리스천이

승리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를 갖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는 크리스천으로부터 그 무기를 빼앗으려고 마음 먹는다.

이제 싸움의 승패는 누가 그 무기를 소유하느냐에 달렸다. 그 무기는 바로 기도이다.

 

 이처럼 사단과 성도는 지금도 서로 싸우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써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단이 크리스천에게서 기도의 무기를 빼앗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단은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지지하는가? 그는 우리가 기도를 미루거나 빼먹도록 유혹한다.

사단은 혼란한 생각, 주의 산만, 불신, 절망을 통해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모든 훼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기를 굳게 잡고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기도의 용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단의 공격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으며,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일일이 열거한 후 이같이 권면하였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기도하지 않으면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효력이 없다.

이 모든 것은 기도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다.

하나님! 저희가 믿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