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1:2)"
"이것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니라(요일5:20)"
"생명"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말은 신약성경 중 가장 깊이가 있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두 권의 핵심어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이 진리와 성품과 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비해, 이 투 책은 생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은 믿는 이의 행할 바와 어떠함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만, 요한은 믿는 이들이 자신에게 제시된 모습으로 갖추어지고, 주어진 일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비결을 제시해 줍니다.
자연의 신비는 생명입니다. 인간의 온갖 지혜와 지식을 다해도 결코 밝혀 내지 못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과학을 통해 사물의 원리를 알게 되고 자연의 힘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 낼 수 도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로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생명을 갖도록 하는, 이 이상하고도 미묘한 전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이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생명이 시작되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새로운 탄생에서 시작하여, 세세토록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최고의 발달 단계로 이끌어 갑니다. 요한일서는 신성한 생명의 근원과 발전, 유출을 훨씬 더 확실히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생이십니다
행성이 운행하고 벌레가 울고 천사가 노래하기도 전, 그리스도 그분은 영생이셨습니다. 원래 요한일서1:2은 흠정판의 표현보다 더 강한 어조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말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그 생명을 보이노니 영원한 생명이라, 이는 아버지와 함께 하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5:20은 이 생각을 좀 더 확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자연의 생명은 주님의 창조의 힘이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정신과 생각과 지성의 활력도 주님의 무한 지력에서 발산되어 나온 것 뿐입니다. 가장 강대한 별에서 가장 가녀린 가지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주님의 생명입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부활절 백합의 색깔, 수선화의 향기, 야채의 풋풋한 생기,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영혼 하나하나 모두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시대와 나라를 무론하고, 교회는 주님의 생명과 권능의 새 피조물입니다. 모든 성도는 살아 계시고 머리되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지탱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며, 주님 안에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샘이 있으며, 결코 다함이 없는 풍성이 있음을 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여기서 '영원'이라는 말은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삶입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대양처럼 한없는 풍부와 영광스러운 충만이 가득한, 영원 세대의 길이와 무한 영역의 것이 생명입니다.
찬란하고 영원한 생명을 보이며 우리 앞에 서서 "내가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계1:18)" 라고 선포하시는, 생명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나타내신 바 되신 생명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이 말씀에는 주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과 세상에서 사신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또 요한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자주 사용한 '생명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전부 포괄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생명이신 말씀'입니다. 말이 사람의 생각을 나타내듯이, 주님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시고, 이미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글로 쓰여진 것만 보여 주시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을 보내시사, 이땅 삶의 세세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수년 동안 콩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온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콩고인들에게 도무지 확신을 심어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산상수훈을 설교하다가 그만두고는 자신은 그들속에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기로 했다고 아프리카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당장에그 선교사에게 몰려와서는, 선교사가 가진 모든 세상 물건을 달라고 요구했고, 선교사덕분에 그날로 바로 자기의 말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달라는 자에게는 순순히 내어주고, 빌리고자 하는 자를 외면치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선교사의 아내는 난감해졌습니다. 집안이 완전히 거덜나고, 배고픔만이 자신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의 제 일막에 불과했습니다. 그 밤이 지나기도 전에,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이상한 일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장사꾼 같지 않아. 이 사람은 우리에게 물건을 요구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을 우리에게 준단 말이야.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임이 분명해. 저 사람은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겠어." 라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어제와 다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을 도로 들고 온 것입니다. 이것은 극의 제 이막입니다. 제 삼막은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고, 콩고에서 가장 큰 교회가 세워지는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저들은 이 나타내신 바 된 생명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말보다 더 힘있는 실물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복음의 의미를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삶은, 하나님께서 진실된 인간의 삶에 대해 기대하는 바에 온전히 부응하는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이는 내가 심히 기뻐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사신 삶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전형적인 인간이 겪는 인생의 갖가지 색조와 명암, 온갖 세세한 것들이 주님의 세상 삶에 다 들어 있으므로, "예수님이시라면 어찌하셨겠는가?"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를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된 위대한 가르침에 대해 정말 열심을 다하는 중에도,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살으심의 의미와, 주님의 하나님의 현현이시며,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온전한 모본이셨음의 중요성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생명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으심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의 죽으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귀하게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떤 교사 집단에서는 그리스도인 사회주의에 대해서나, 그리스도라는 본에 우리의 갖가지 사회적 세상적 의문 하나하나를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갈보리에 이르지 못하여 모든 성경의 핵심이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며, 경험의 핵을 이루는 이 위대한 사건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요한의 서신서는 참으로 영적 깊이가 있는데, 그 서신서가 시작되는 서두에, 거룩한 경외심과 여린 마음이 있는 이로 멈칫 숨을 멈추게 되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 피로'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서신서의 서두부터 두 개의 진홍빛 색조를 깔아 두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의 검은 자국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와 부활 뒤에 숨어 있는 위대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참으로 신성하고, 참으로 인간적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생명을 희생제물로 자기 굴복으로 내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순종의 모본이었을 뿐 아니라, 죄인들의 속건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만족시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과 그 삶을 깊이 들여다본 요한인지라, 어느 제자들보다도 주님의 피가 가진 희생의 뜻을 더 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말씀은 요한이 쓴 아름다운 복음서의 기조음이 되어 울려 나오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요한서의 배경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게 하시는 주께"라는 말씀은 장엄한 요한계시록에서 거듭 반복되는 구속의 노래의 으뜸음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바로 주님의 생명입니다. 무한히 귀한 이 생명이 바로 우리의 잃어버린 생명을 위한 대속물로, 속건제로 드려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고난을 감상적으로 감사하고, 주님이 겪으신 수치와 고뇌를 동정하며 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겪는 슬픔에 대한 애절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또 그리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위대하고도 의미심장한 사실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이 사실 안에서 주님과 믿음의 교제를 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게 뜻하는 바는 주께서 죽으셨을 때 나도 죽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나 자신의 죄로 인해 처형되어, 이제는 그리스도와 부활한 다른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며, 이전의 죄 때문에 처형되었으므로, 이전의 죄에 대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7)"
그 뿐 아니라 이것은 내가 거룩하게 되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죄지은 나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 얹어 놓고, 나를 죽은 것으로 간주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내게 들어오며, 이 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나의 노력도, 나의 선함도, 나의 악함도 아닌, 오직 내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안에 거할 때, 나는 주님과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고, 주의 행하심과 같이 나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예하여 그 죽음을 여러분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또 이제 그것을 통해 "주님의 부활 권응"으로 주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생명
십자가 앞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이 잘못이듯이, 십자가에 머물러 버리는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만 여긴다는 것은,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즉으심을 재해 버리는 것 만큼이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주님의 부활하심의 배경일 뿐입니다. 주님은 내려놓았던 생명을 다시 취하시고, 이제 우리 앞에 서서 "내가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구주께서 달려 계시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께서 거기에 달리셨지만, 이제는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누우셨던 무덤은 이제 열렸으며, 불멸의 생명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 주는 말씀은 많습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는 주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서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던 그 아침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한이 쓴 이 말속에는 정말 감동적인 무엇이 깃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요한이 주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그 안온한 주님의 품과 사랑의 손길을 경험했노라고 다시 한번 주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이 부활과 관련하여 더 높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아게 됩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시는 것은 대속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의 죽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저의 살으심을 인해 구원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고대 출 애굽에서 모세가 산 아래에서 수소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대야의 피를 취하여 사람들에게 뿌리고, 그 피를 산으로 들고 갑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은 피를 인하여 저들을 받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피의 두번째 역할은 일단 한번 내어 놓았다가 다시 취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고마우신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를 경축합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예하여 저와 연합하는 자 모두에게 주실 새 생명을 가지신, 살아계신 생명의 왕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시다.
내주하시는 생명
이 생명은 주님을 위한 생명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이제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되살려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에 펼쳐 보이는 성화의 비결이며, 이 서신서와 관련된 수수께끼와 같은 갖가지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신약성서에서 이 서신서만큼 거룩함의 문제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듯한 말을 많이 한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일장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는 말씀이 있고, 그리고 좀 뒤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요일3:9)"라고 동일하게 역점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 이 둘을 어떻게 절충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간단합니다.
먼저 우리 - 바로 인간인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으며 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선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가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자로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았는데, 주님의 생명은 죄 없으신 생명입니다. 주께서 심으신 씨는 더러운 땅에 심겨도 천사의 날개처럼 순수하게 자라며, 그 주변의 토양에 물들지 않는 아름다운 구근처럼 흠이 없습니다. 이 씨는 근분이 다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원초적으로 그 본성이 순수합니다.
이 모든 신비의 열쇠는 이 서신서의 두 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3:6)". 여기에 거룩함, 즉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함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완벽해진다는 말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께 매여 있으면서,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끌어낼 때, 우리가 범죄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비밀은 내주하시는 생명이신 주님입니다.
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릴5:18)". 여기서 동일한 진리가 다시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는 우리를 죄의 권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키십니다.
마귀의 공격은 종종 있습니다만, 우리는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새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벌레와 같아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여기에 영적 생명의 근원되시는 주 예수의 인격과 연합이 있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비밀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너희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제자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세세토록 찬양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그 모든 충만 가운데
영원한 생명, 나타내신 바 된 생명, 십자가에 못박히신 생명, 부활하신 생명, 내주하시는 생명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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