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거하기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요한은 오직 어린 아이들만이 주님 안에 거하며, 우리가 어려져야 충만하신 주님을 알 수 있고, 남성적인 혹은 여성적인 힘을 내지 않고 의존적이 되어야 비로소 주님의 힘이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가 의지할 힘이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어린 자녀들 가운데 넣었습니다. 저가 우리에게 이 말을 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보아너게가 죽던 때부터 영적으로 어린아이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머리를 예수님의 가슴에 파묻고, 더 이상 자신 속에 거하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감싸 주시던 팔을 다시는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는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안에 있다는 것과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제 이렇게 깨달은 것이 마음에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들아,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우리로 담대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이 거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 뿐 아니라, 우리의 힘도 내려놓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떠받쳐 주십사 하고 마음을 허락했습니다. 참 신부처럼,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 우리 이름, 우리의 독립성을 포기했으므로, 이제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주님 안에 잠기고, 주님이 우리으이 머리가 되고,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것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로 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거하면, 어떤 의미에서 이에 따라 주님도 거하시게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네 안에 거라리라."
순간으로 사십시오.
먼저 거하는 삶은 순간순간의 삶이며, 물 흐르듯이 저절로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동과 습관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가지면, 주님을 온전히 가지는 것이 되며, 그 순간 우리는 온전히 구원받고, 그 순간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이 한 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음 순간을 채울 만큼 크므로, 매 순간 이 교제를 새롭게 한다면, 우리는 항상 주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간을 잃어버리면, 이음새가 끊기고, 조그마한 틈이 생기고, 바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물방울이 조금씩 스며 나오다가, 마침내는 큰 물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 삶이 실패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것 때문입니다.
만일 한 걸음도 승리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면ㅇ, 늘 승리속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이 비밀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더 이상 은혜와 승리를 필요하지 않다 할 만큼 늘 거룩한 상태는 아니지만, 단지 이 순간을 위한 은혜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또 다음 순간을 위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생을 마감할 때에는 대양처럼 넓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약하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었지만, 매 순간 흘러 보내다 보면 길을 다하기 전에 물줄기는 한없는 바다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확고한 의지적인 행동
다음, 이러한 거함은 명확한 의지적 행동과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이고 정하고 굳은 신뢰를 계속할 때 확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저항불능의 무의지적인 충동으로는 안됩니다. 신뢰성 있는 행동에서 시작해서,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나면,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은혜가 자신을 몰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지적인 행동, 선택을 통한 행동이 영적 삶을 이끌어 가는 진정한 키가 됩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선택하는 실제 행동을 통해 구원받고, 자신을 내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모든 것 삼는 명확한 행동을 통해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키를 정함있게 붙들어야 합니다. 매 순간 매 순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계속 꼭 불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었을 때와 같습니다.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면, 호흡은 멈추어 버린 것 같습니다. 다시 숨을 쉬게 하려해도 스스로 하는 호흡은 안되고, 억지로 계속 펌프질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공기를 내쉬다 들이쉬다 합니다. 한 삼십분 정도 그리하면, 스스로 호흡하는 듯한 행동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좀 자연스러워지면서 스스로 호흡하게 됩니다. 그러다가는 곧 힘들이지 않고 호흡하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명확한 노력이 있어야 하며, 그러다 점차 저절로 되어갑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면, 거한다는 것은 영적 습관이 됩니다.
선지자는 마음을 "하나님께 두었다"라고 하고, 다윗은 "주를 의뢰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결심함으로 시작하고,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주께 순종해 나갈 때 점차 그러한 습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습관의 법칙
또, 제 삼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습관입니다. 모든 습관은 작은 행동의 연속으로 형성되어 갑니다. 습관은 장성한 상태로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나무뿌리처럼, 과육속의 섬유질처럼 자라나고, 음식 조각이 우리 신체에 흡수되는 것처럼 들어옵니다.
사람이 인생 길을 꾸준히 걸어가다 보면, 수년간의 습관에 의해 그 길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속기사는 들으면서 바로 적습니다. 처음에는 서툴고 느리지만, 결국 습관이 되어버려 글자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고 멈추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말이 입술에서 나오는 것 처럼, 글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펜을 잡아야 할 때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명을 갈겨써도 언제나 같게 나옵니다. 우리의 친구도 알아보고 은행원도 알아보고 바로 우리의 서명으로 보아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수년동안 같은 표시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덕이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결국 습관은 필수적인 것이며, 갈수록 쉬워집니다.
죄악도 그렇습니다. 아래로 내려갈 수록 내려가기가 쉽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도 그러합니다. 올라갈수록 올라가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눈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눈꺼풀은 본능적으로 움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먼지가 들어와서 눈을 아프게 하기 전에, 작은 덮개가 연약한 눈동자 위를 덮어 줍니다. 말을 하게 될 듯하다 싶으면, 본능적으로 혀를 물게 됩니다. 이와같이 죄가 다가오기 전에 죄의 냄새를 분별하게 되고, 위험이 다가오기 전에 하늘로 불분명하지만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순종의 습관이 형성되는 것도 이렇습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주님께서 우리로 하기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습관을 확고하게 형성시켜서, 순종이 쉽고도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이런 작은 시험들 속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자제
또, 그리스도안에 거하려면, 스스로에게는 신뢰할 것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자제는 신성충만과 효능을 잘 드러내기 위한 최고의 필수요건임이 틀림없습니다. 돌발 사고가 나면, 사람은 금방 자기를 주장하며 튀어나옵니다. 베드로가 상대를 물리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칼부터 뽑는 자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일을 하고 나면, 몇 날 몇 주를 후회하게 됩니다.
충동 대신 주님을 택하십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주님께 방해가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억제하기를 연습하고 모든 것에 대해 우리의 뜻을 미루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주님의 뜻은 어떠신지요? 주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러할 때 여러분과 주님은 뜻이 어긋나지 않고, 복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차분하고 조용한 습성을 가지며,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온갖 것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행할 바를 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성급한 판단은 뒤로 미루고 하나님과 조용히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완고하고 충동적인 심령을 가진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못합니다.
의존성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갑작스러운 어려움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맡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늘 의뢰하는 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즉,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곳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께서 우리 생활의 모든 일을 맡아 주셨으르모 주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하고 그저 주님을 의뢰하기만 하면, 앞으로 닥칠 어려움은 없을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들고 지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깨달음
또,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주님을 우리 자신의 가장 중심되는 부분에 계시는 가장 가까운 분으로 인식하는 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 하늘로 손 내뻗으며, 주님께서 가신 곳이 어딜까 하며, 주님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주님의 보좌는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주님의 능하심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라 행하십시요.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그러면 곧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게 되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기분으로 시작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기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시작하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거하려면,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들이 주님안에 있는 것처럼 주님을 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신뢰에 응답하실 것이며, 여러분들의 확신을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만유 안에 계시는 주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삶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것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과 주님의 섭리 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닥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관계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같은 것을 허락하셨는고 하며 물으면서 의아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끌어들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물결이 거세게 몰려오소 그 머리를 높이 들어도, 하나님은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시며, 큰 바다 물결과 많은 물소리보다 더 힘이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노로 장차 주를 찬송하게 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실 "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46:13)"
모든 것을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내어 놓으신 최선의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길 능력을 우링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혹은, 우리에게 거룩함과 신뢰와 고요함과 용기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런 것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황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들어맞는 것이므로 다른 상황을 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 속에서 이겨 나가야 합니다. 도암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그곳에 닿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리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ㄷ의 항구에서 뿐 아니라, 배와 폭풍우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주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역사하도록 만드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로 알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외적인 것을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오감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체의 감각만큼 쉽게 우리로 위험한 들과 곁길의 초장을 헤매도록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우리를 멀리 데리고 가 버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거리를 걸어가면, 수천 가지 것이 기억납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은 거미의 눈과 같아서 앞뒤 좌우 사방을 봅니다.
솔로몬은,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라"라고 합니다. 어떤 문으로든지 세상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 하나님의 존전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대화라 하더라도 그 백분의 일만 들으면 완전히 때묻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니 귀와 눈을 삼가고 삶의 영역을 작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일은 많이 맡았는데 반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곤란합니다. 이런일이 생기면 초조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거미라고 불리는 작은 생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에 살고 늪의 진흙 호수로 내려갑니다. 겨우 몇 인치 내려가서 늘 거기서 삽니다. 이 물거미는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공기 방울을 몸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이상한 장치가 있습니다. 물 거미는 물 표면에 올라가서는 거기에 공기를 가득 채워서 내려옵니다. 이 작은 공기 방울이 생활 터전이 됩니다. 거기서 물거미는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릅니다. 공기가 있는 곳에는 물이 들어갈 수 없다는 원리 때문에, 이 거미는 그 주변의 검은 물속에서도 조그마한 집을 짓고, 저 위 깨끗한 공기 속에 사는 것 처럼, 안전하세 살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본래의 환경 속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죄가 있고, 우리 아래에 음부가 있고, 사람들이 싸우고 시험받고 죄를 지어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 있는 저 위 성도들처럼 안전할 수 있습니다.
내적 기도
또 만일 주님안에 거하려면, 마음속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내적 기도의 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씀의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습관이 거함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잘 사용하던 말에는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묵상기도는 차분히 가라앉는 심령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경성
거함과 관련된 또 다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성입니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류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붙드는 심령이며, 늘 경계하고 주님께 가만히 붙들린 심령입니다. 이 말은 이제 붙들고 지키는 것 모두를 우리가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키에 손을 얹어 놓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조정하실 것 입니다.
이것은 기차의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브레이크를 잡는 사람이 레버를 건드리기만 하면 전류는 흘러가게 됩니다. 기관사가 기차를 가도록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조절판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주장할 말씀을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슴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오면 하늘의 천사들이 그 말슴을 떠받을어 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 순간 순간 교제와 승리에 거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환경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하십시다.
만일 그릿흐도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으로 인도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믿는 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셨을 때, 주님이 우리를 들고 가시게 됩니다. 주님은 다른 길로는 가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강 한가운데 들어왓으면, 강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가슴에 들어왔다면, 주님과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삶을 내어 드리고 나면, 삶은 전능하다 할 만큼 강해지고, 천국처럼 달콤해질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로 경성하게 하기 위해 갑작스러운 시험이 우리를 덮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와 같은 일이 생기면, 우리로 깨어 있게 하시려고 주께서 보내신 것으로 여기십시오. 마치
눈꺼풀이 내려오면 위험이 닥친 것을 눈이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종종 우리 자신이 경성하고 있지 않으므로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참 길을 벗어나면 주께서 시험을 허락하셔서 저로 자신이 대적의 나라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 죄악이 우리에게 덤비려면 주님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리스도께서는 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여 우리로 주님 뒤로 물러가도록 할 것입니다. 마치 양치기 개를 보내어 양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 어려움을 겪는 것이 종국에 재난을 만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실패
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실족할 때가 있는데, 절망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는 축복을 잃어버린 거야" "내 인생은 어찌할 수가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실재하시도록 하는 법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재하시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느끼기에 어려운 일은 실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 만큼 실재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자들도 이런 저런 일과 여러가지 시험은 실재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도 주님이 고통만큼 실재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실재하시도록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재하는 것 안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두통이 실재하면, 주님을 그 속에 모시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두통만큼, 아니 훨씬 더 실재하게 될 것입니다. 두통이 사라진 후에도 주님은 여전히 거기에 계실 것이니 말입니다. 시험이 실재할 것입니다.
이 시험은 여러분의 삶에 불같이 들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그리하실 것입니다. 세탁과 다림질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여러분의 집으로 모셔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동일하게 실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삶과 연결 지울 때, 실재하십니다.
벵골 보리수 나무가 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먼저, 그 줄기와 가지가 하늘로 치솟아 오릅니다. 그리고 나서, 줄기가 땅으로 내려가서는 흙 속에서 뿌리를 박습니다. 그리고 조금 조금 씩 수백 개의 가지가 땅에서 나오고, 다시 얽히고 설켜서 폭풍우나 바람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인도양 폭풍이 와도 뽑히지 않게 됩니다. 수백의 뿌리와 가지는 얽힌 채로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잡아 묶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은 가지를 하나 심으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ㅏㄷ.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도와주시려고 오시는데 그 어려움 하나 하나가 가지로 자라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삶은 수백 개의 실 같은 뿌리를 내리며, 그로 주님께 매여지게 됩니다.
지옥의 온갖 권세도 주님과의 교제를 깨지 못하고,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
생생하고 뚜렷한 실체로 내게 오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어떤 외적인 것보다
날카로운 믿음의 눈에 더 크게 자리 잡으시고
세상에서 그 어떤 달콤한 사이보다도
더 다정하고 더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오소서
내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살아 계신 사랑의 구주가 되어 주소서.
주님! 더 밝은 얼굴 빛을 보여 주시고
주님 은혜의 말씀에 영광을 더하소서.
생명이 변하여 사랑이 되고
이 아래 천국이 저 위의 천국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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