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 보좌 앞의 나(4)
내주님 보좌 앞의 삶의 논리
F.J. 휴겔
우리는 신약에서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보았다. 주님께서 보좌의 삶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도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합니다. 믿는 자는 주님과 함께 들어 올려지고,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자리 잡습니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고...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합니다.”(롬5:17)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만물이 다 믿는 자의 것입니다.(고전3:21) 믿는 자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골3:4)
순수히 성경적인 근거를 별도로 두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지극히 논리적입니다. 신약성경은 논리를 역행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계시이므로 논리를 초월합니다. 자연현상에서도 성경의 진리가 뚜렷하게 스며들어 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 놀라우신 우리 주님, 대속의 원리, 사람의 운명을 어찌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겠는지요! 분명 논리만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시가 있으면 우리의 이성은 계시의 더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끌어안습니다. 이 때, 이성은 말씀이 펼쳐 보이는 천국의 일을 묵상하면서 자연과 삶에서 성경 계시의 논리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를 찾아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성은 보좌 앞의 삶에 흐르는 논리를 재빨리 포착합니다. 장미가 장미덩굴이 되고, 파종과 경작과 비와 햇빛이 밀의 수확을 낳는 것처럼, 보좌 앞의 삶은 구속의 본질에서 솟아나옵니다. 보좌 앞의 삶이 없다면, 그 이전의 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보좌 앞의 삶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도달하는 종국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구주의 오심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성경을 상고하여 보라.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신성이 처녀의 몸에서 인성을 입으셨으니, 여기에 경건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딤전3:16) 깊은 의미를 살펴보면,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우리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유사성이나 표면적인 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가 새이고 물고기가 물고기이듯, 주님은 사람이셨습니다. 이렇게 세련되지 못한 비유를 쓰는 것을 용서하십시요. 하지만 이는 분명히 강조해야 할 사실입니다. 구속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이루신 일이며, 보좌 앞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말미암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내신바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 사람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사람으로 당하신 고난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죄가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죄가 원칙적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성경 말씀처럼, 믿는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입니다. 우리의 죄가 제하여졌고, 우리의 죄는 정죄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말은 로마서 6장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모든 믿는 자의 고백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제 삼일에 일어나시되, 사람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셨고, 육신을 입고 영광 받으시되, 여전히 인간이셨습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일어난 것도 우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엡2:4-6)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골2:12)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은 사람을 대표하시는 주님과 주님께서 대표하시는 사람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주님의 승천하심과 보좌에 함께하도록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이르렀습니다.(엡2:6) 이제 우리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믿는 우리에게 임하신 능력은 영광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일으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높이실 때 역사하신 능력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자리는 우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좌의 권세를 누립니다. 이것은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은 보좌 앞의 삶을 예표 하는 아름다운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경우를 보십시오.(삼하9장) 므비보셋은 로데바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양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 당시 처절하게 몰락한 사울의 집안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반역자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시절 동양에서는 왕에게 대항하다 몰락한 집안사람들은 오늘날에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엄청난 수욕과 핍박을 당했으니, 그보다 더 처참한 형편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하여 요나단의 후손을 돌보겠다고 언약한바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심히 핍박하고 죽이려고 사정없이 수색했던 사울의 자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왕은 사자를 로데바로 보내어, 영락하여 천대받는 절름발이 므비보셋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므비보셋은 놀라서,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의 상에서 식사하며, 왕의 아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다윗왕은 이전의 땅을 모두 그에게 돌려주고, 사울의 옛 종 시바와 그의 아들에게 므비보셋을 위하여 땅을 경작하여 식물을 가져오라고 명하고, 므비보셋을 왕궁에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성경은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개와 같던 처지의 므비보셋이 보좌로 들어올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와 유형은 결국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보좌의 영광은 므비보셋의 영광 이상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화하는 영광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서신서에서 언급한 것이며, 주께서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며, 요한이 계시록에서 구속의 완성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아들을 위하여 혼인을 준비하는 어떤 왕과 같습니다.”
왕의 아들이 있는 곳에는 신부도 있습니다. 왕의 아들이 보좌에 있으면, 신부도 보좌에 앉을 권한이 있습니다. 왕의 아들은 언제나 자신의 신부와 함께 보좌에 앉습니다.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노래한 가장 위대한 시편으로 다스리시는 왕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히브리서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왕으로 오실 구주를 바라보며, 왕비가 오빌의 금으로 단장하고 왕의 우편에 앉은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왕비가 왕의 보좌 우편이 아니면 어디에 자리 잡겠습니까? “왕의 딸이(동양에서는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보좌 앞의 삶은 완전한 분리를 근거로 합니다. 보좌 앞의 삶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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