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문지기/F.J 휴겔

내 주님 보좌 앞의 나(3)

작은둥지 2008. 9. 23. 19:30

내 주님 보좌 앞의 나(3)


내 주님 보좌 앞의 삶 계시

F.J. 휴겔


사도 바울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얼마나 생생하게 경험하고 살았는지는 에베소의 형제들을 위한 기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기도는 이러하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5~19)”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해보자.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보여주고 또 그들을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를 전달하고자 영광에 영광을 더하도록 하는 지극히 큰 능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이 능력을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사람의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었다.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이 엄청난 능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자 결국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를 드리며, 영광의 아버지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마음눈을 밝혀주심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를 구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를 향하신 지극히 큰 능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엡1:20)”이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는 자가 동일하게 누린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항상 품고 있던 기본 생각이며, 하나님 계시의 궁창에 가장 빛나는 별이다. 이 능력을 누리는 것이 바로 구속의 영광이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구주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이며, 이 둘은 하나라는 것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6:17)”. 머리에 해당되는 것은 몸의 지체에도 해당된다. 주님께서 구속받은 인간의 총체적 머리되시는 인자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셨으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모든 이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주님 보좌 앞의 삶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천국에 앉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같이 더듬어 보기로 하자.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0~23)”. 이 생각은 아주 명료하고 단순하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의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주님의 보좌로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격스럽다. 성경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그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성령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와 같이 높은 단계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과 보좌에 참예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니다. 오만은 믿음의 시녀가 아니라 의심의 시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좌를 주셨으니, 흙먼지 속을 기어다니도록 하는 거짓 겸손에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보좌 앞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마귀의 성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가 주님의 보좌 앞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겸손에 대해 번지르한 변설을 늘어놓지만, 그 결국은 불복종과 의심과 오만과 무익함이다. 약속의 땅, 여리고를 보고 위축되었던 첩자의 거짓 통보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 비록 장대한 거인들이 있다 할지라도 일어나서 들어가자.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다.


에베소서의 핵심은 1장3절 말씀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 일은 우리의 느낌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여부와도 상관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실제 경험하도록 말씀대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경험이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경험은 유동적이고, 동일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이 기준을 따를 뿐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가 주님이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한다고 정하시고, 우리를 불러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앉히셨다고 하신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지극히 큰 능력은 주님이 아버지의 보좌에 오르실 때 일하신 능력이다.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말씀으로 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현재 이 축복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보좌 앞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법적인 자리이다. 이 자리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누리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한없이 큰 부요를 상실할 뿐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파하면 죄가 우리 문 앞을 지킨다.


우리가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바울의 기도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계시를 근거로 한다. 계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를 구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러한 고백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시로 인한 것이며 혈과 육으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하셨다.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다. 계시가 없으면 어떤 것도 진행되지 못함을 볼 때, 우리 믿음의 시작이자 마침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보좌의 삶이 실현되기 전에 먼저 계시가 있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조명하심과 일하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겠다.


“만일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 여기에서 “만일”은 의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연결사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라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이는 에베소서에서 선포한 바와 같다. 보좌 앞의 삶이라는 최상의 단계는 희미한 환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원한 진리의 최고봉이다.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충만한 영광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성령님께 밝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고, 여기에서 다시금 우리 믿는 이들이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그로 인하여 주님의 부활과 보좌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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