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의 보좌 앞의 나(6)
제6장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으로 가는 길
F. J. 휴겔
이제 우리는 왕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보좌 앞의 삶을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언제나 길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며 지혜가 되십니다. 사실 우리가 논하는 보좌 앞의 삶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은 언제나 복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은 베드로가 선포하듯 영원한 영광스러운 사실입니다. 구속은 주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다른 근거는 바닥이 없는 모래밭이며 거짓입니다. 구주께서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데리고 가신 것도 사실입니다(롬6장). 법적으로 우리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눈먼 사람이 해의 존재를 의심한다고 해서 우주 천체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 여부가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더구나, 구주의 부활은 참 믿음의 사람 모두를 죄의 무덤에서 일으키신 총체적인 부활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알 수 있듯이, 믿는 자는 구주의 부활 권능을 함께 누릴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자리 잡는 영광을 누립니다. 우리가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법적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자리 잡는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반복하거니와 우리가 주님 보좌 앞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 여부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혹 모든 사람이 의심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보여주시는 다른 것들처럼 우리의 법적인 자리가 주님의 보좌 앞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보좌 앞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길을 따라 일하십니다. 이것이 최상입니다. 우리가 믿음도 없이 보좌 앞의 삶을 누린다면 이는 우리에게 해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한 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온전히 들추어내고,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이 주는 영적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어 아버지께 영광 돌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께서 피로 사신 유업을 얻고자 열심을 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임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동기가 잘못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축복이 클수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원리는 더 철저하게 지켜집니다. 우리의 욕심에 근거하여 소멸될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보좌로부터 어떤 특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루 도는 천사의 화염검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지 않겠는가? 열매 맺는 일이 사람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볼 때,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에는 믿음이라는 내적 원리가 항상 함께 하며, 이 원리의 기저에는 십자가가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내가 나를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갈2:18) 그러므로, 먼저 믿음이라는 중심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나머지는 놀랍도록 쉬워집니다. 어떤 신학자는 “쉽지 않은 것은 선하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선은 우주가 떠받들고 있으므로 쉽습니다. 온 세상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선을 떠받히므로 선은 쉽습니다. 아이가 왕인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듯, 아내가 대통령인 남편의 집무실에 들어가듯, 우리는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기뻐하며 받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하늘로 올리신 권능을 함께 누리며 영적으로 주님의 보좌에 참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동참하면서, 전심으로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때, 하나님의 권능은 믿음의 다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들어와서 말씀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갈등은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인들도 죄 사함과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디딜 때도 갈등을 경험합니다. 갈등은 하나님께서 사실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갈등은 사실에 대한 의심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의 경험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경험은 바닥없는 모래밭 같이 유동적이므로, 경험을 바탕으로 터를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느낄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느낌을 따르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느낌과 상황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완전히 역행할 때에도, 믿음은 “아멘”이라고 하며,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느낌을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좌 앞의 삶이라는 최고봉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최고봉은 산 밑에서 출발하여 차츰 차츰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정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모든 것을 이미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정상에서 시작합니다. 보좌 앞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누리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므로, 우리는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라는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순서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바꿉니다. 사람들은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공로를 쌓고, 애쓰고, 무엇이나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순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소리치면 여리고 성은 무너집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가하므로, 믿음은 노래합니다. 보좌 앞의 삶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보좌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 최고봉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정상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보좌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에베소서2장 4~6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최고봉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성령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의 긍휼은 영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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