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의 보좌 앞의 삶(8)
제8장 보좌와 개인의 승리
F. J. 휴겔
이제 우리는 보좌 앞의 삶에 대한 가르침의 실제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보자 앞의 삶은 중요한가요? 중요하다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세상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을 통해 구별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외모를 보아도 세상적인 기쁨과 유행,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이 너무도 확연합니다. 독일인이 말하는 “세계정신”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은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물고기가 물에서 살듯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 물이 스며들어오는 것은 자명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과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시...” 라고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구하신 기도가 응답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와 십자가와 빈 무덤이 있는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 마귀라 칭하신 “이 세상의 임금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좌지우지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보좌 앞의 삶은 믿는 이들의 일반적인 대답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제공합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들은 주께 연합한 자로서의 특권을 인식하고 주와 한 영이 되고, 사도바울이 주님과 함께 하늘의 보좌에 있다고 한 것을 믿으며 간절하게 아멘으로 받습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아고,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을 훌쩍 뛰어넘어 높은 영역으로 솟아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은 그에 대하여 못 박히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는 이 세상이나 오는 모든 세상의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 모든 것을 발아래 둡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주의 부활의 권능을 함께 하고 영적으로 보좌의 주님과 함께 앉기 때문에,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자들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믿는 이들을 십자가와 빈 무덤을 거쳐 보좌로 인도하신 것은 “세상과 육과 마귀”가 휘두르던 능력을 깨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자동차로 들어차 있는 거대한 도시의 도로에서 사람들이 들이 마셔야하는 유해 공기를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공기 없이 살 수 없지만, 이 공기를 마시면 죽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소망과 행로와 야망과 삶은 모두 세상의 방식을 따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되어 신실하게 구주를 좇으면서도 세상의 방식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세상의 속박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신실하게 교회에 출석을 하여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도 세상 영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양무리가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서도 세상의 영과 온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세상의 영을 호흡한다면, 교회 출석이 세상을 이기게 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 때 사람들은 수도회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동굴이나 사막에서 은둔자의 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세상과 함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공중의 권세 잡는 자”를 내던져 버릴 수 없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형편은 더 나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두 세계를 모두 이용하려고 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주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해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주의 부활의 권능으로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보좌 앞의 삶을 살 때, 사단의 “마력”은 완전히 깨뜨려집니다. “이기는 그를 내가 보좌에 앉게 하여 주리라” 라는 말씀은 “내 보좌에 앉는 자는 세상을 이기리라”라고 해도 의미는 같습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는 사무실에서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상점에서나 내내 천국의 대기를 호흡합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기뻐하며, 그 잔이 차고 넘칩니다. 심장이 박동하는 순간순간마다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세상이 발 앞에 세상적인 즐거움을 쌓아두어도, 믿는 이는 영혼이 거하는 높은 하늘을 마음으로 붙듭니다. 믿는 이는 그리스도와 보좌를 함께 하므로 최고봉에서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보좌의 삶을 누렸습니다.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 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보좌 앞의 삶도 이전의 삶과 같아 보입니다. 믿는 자는 이전에 하던 일을 충실히 하고, 가정에 있든지 예배를 드리거나 일을 하거나 놀거나 간에 일상의 걸음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유일한 뚜렷한 변화는 모든 것을 한층 깊고 순수한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는 이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며, 깊고 순수한 겸손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이는 섬김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기며, 구주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상한 심령을 묶으신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고자 합니다.
물론 영적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것은 이들이 사람들을 존중하고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보좌 앞의 삶에는 비정상적인 것도, 과장된 것도, 불균형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보좌 앞의 삶은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수강이 믿는 이의 심령에서 한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늘 보좌의 영역에 침노하지 못하므로, 믿는 이는 세상을 이깁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거룩하며 지향하는 바는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믿는 이의 삶은 6월 저녁 소나기 후 맑은 아침을 채우는 장미의 향기처럼 순수하고 풍성하고 충만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사람이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사단은 믿는 자를 보좌로부터 끌어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무기를 모두 동원합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사람은 육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없거나, 자랑과 인내 부족과 정욕과 시기와 자기 의와 못된 말투와 나쁜 생각(한마디로 하면, 죄와 자기만족)이 없어져서, 다시는 비열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지만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혹시 깨어있지 않아서 주님께 근심을 끼치게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죄를 자백합니다. 이전에도 지적한 바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 기본적인 자리를 벗어나면 십자가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어떤 형태로든 다시 육을 들추어내게 됩니다. 보좌 앞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깨어있으며, 주님께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라고 하신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삽니다. “서 있는 줄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지만 세상의 마력이 완전히 깨뜨려졌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좌 앞이라는 높은 곳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나라의 영광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에,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이 세상의 헛된 영광에서 어떤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딱딱하게 율법적으로 “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태도보다 매력도 없고 열매도 없는 것은 없습니다. 보좌 앞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보좌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며 생명과 힘이 가득합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보좌 앞의 삶에 풍성한 광휘와 기쁨 충만한 신선함을 주므로, 믿는 이는 세상의 어떠한 기쁨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좌 앞의 삶은 바로 사도바울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할 때 마음에 품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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