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문지기/F.J 휴겔

내 주님 보좌 앞의 나(11)

작은둥지 2008. 9. 23. 19:23

내 주님 보좌 앞의 나(11)


보좌 앞의 섬김

                                                                                                                                              F.J. 휴겔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내 주님의 보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온전할 수 도 풍성할 수도 없다. 섬김의 모습과 성격과 효과는 결국 삶의 질과 섬김의 밑바닥에 놓여있는 동기에 좌우된다. 그리스도인이 사역자로 일하든지 평신도로 일하든지, 물 한잔을 주든지 위대한 설교를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이름과 영으로 하지 않은 일은 섬김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주께서 믿는 자의 심령에 약속하신 생명수 강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15장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필요한 것은 섬김이나 일이 아니라 열매이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일하고, 자연인으로 육적인 힘을 행사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 있는 곳에는 당연히 ‘열매’가 맺힌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은 이 예리한 말씀으로 논점을 분명하게 세우셨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나오듯, 믿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다. 이것이 성립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리스도인이 지극히 위대한 선교사역을 하든지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섬김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결코 평범할 수 없지만), 생명수의 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지 않으면, 열매 맺음의 유무는 금방 드러난다.


물론,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살아있는 믿음을 두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섬기고자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드러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 생명력이 아주 미약하여 겨우 졸졸 흐르는 개울물 정도일 수도 있다. 아마존강과 작은 시냇물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은 생명수의 강이다. 에스겔47장에서는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나온다. 이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더니 무릎에 오르고 다시 허리에 오르고 헤엄할 물이 되고,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된다.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아난다.


밧모섬의 요한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죽어가는 이세상에 대해 축복의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바짝 다가서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하늘 보좌에 앉은 이들이다. 생명수의 강이 우리의 심령에 충만히 넘쳐흐르게 하려면 우리는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아의 삶’에서 나오는 힘으로 일한다면, 그것은 바싹 말라버린 샘을 펌프질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강하게 고백한 것과 동일한 근원에서 출발하면. 생명수의 강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목마르심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을 거쳐 보좌에 이르는 열매 맺는 삶을 통해서 해소되었다. 우리도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에 비밀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시키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저항세력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지에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악함과 우상숭배와 온갖 종류의 마귀들과 싸워야 한다. 이러한 산들은 움직이기 어렵다. 하지만 소위 그리스도인의 땅에 서 있는 대적의 산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무지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많다. 나도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처리해야 비로소 보이는 장애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수년 동안 십자가의 군사로 장애물들과 싸우다가 마침내 이 관계를 이해하고 확실한 병기를 사용하자 장애물들은 하루 밤에 사라졌다.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사는 삶이며, 이 삶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수많은 눈물과 기도와 애태움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허다한 나라와 교회와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수년 동안 진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믿는 자는 육적 병기가 아닌 하나님의 강한 병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병기를 사용할 줄 아는 자가 사단의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주님 보좌의 권능을 행사할 때, 대적의 산은 움직인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에베소서6장) 항상 잊고 산다. 이것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리는 향방이 없는 자와 같다. 겉치레가 많은 교회일수록 어둠의 영들은 더 잘 숨어들어온다. 하지만 영적 실체에 대해 눈을 뜬 사람은 속지 않는다. 단순한 전도나 찬양이나 기도만으로는 산을 움직이지 못한다. 능력이 있는 기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싸우듯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적에 대항하여 실전에 뛰어 들어야 한다. 단순히 혈과 육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장난감 권총으로 지브롤터해협을 움직이려는 군인처럼 우스개가 될 뿐이다. 현대의 전쟁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육군이 전진하기 전에 먼저 공군이 작전을 수행한다. 주 예수님은 이러한 근거 위에 나아가셨다. 주님은 사단의 땅을 처리하시기 전에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셨다. 그것은 겟세마네동산 아버지 보좌 앞에서 이루어 졌고 그곳에서 벌써 승리를 맛보셨던 것이다.


많은 근본주의자들의 수고가 수포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이단은 신학교와 교단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것들은 벌써 뿌리를 뽑았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혈과 육’과 더불어 싸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으면서도 ‘육’에 빠지고, 성령님은 이러한 혈과 육의 싸움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근심하신다.


하지만 사단이 이러한 류의 싸움을 주도한다는 것을 알면 사정은 달라진다. 먼저 사단의 획책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내 주님 보좌에서 바라보면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영광 받으시고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권능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뿌리부터 마르게 하셨듯이, 우리가 진실하고 순전한 삶을 살고 모든 사단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때, 십자가는 보좌와 함께 일한다.


우리가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에 흐르는 원리를 깨닫고 자아의 삶을 벗어 버릴 때, 우리는 주님과 보좌를 함께 누리고 있음을 깨닫고 전혀 다른 근거에서 출발하게 된다. 우리는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획득한 승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나아간다.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보좌와 보좌에 속한 모든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스도 승천의 권능 속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먼저 하늘 처소를 정돈한다.

내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평원을 공략하기 전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군대를 결박하고,(겟세마네동산의 주님처럼)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셨다는 사실을 굳게 붙든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주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기 위해 이러한 근거에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