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세 가지 (9)
이천은(李天恩) 목사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자신은 거듭나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며 이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갈 것임을 알지만,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증명해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더 이상 알려고 추구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이러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병에 걸려 암 말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세상 의사들은 치료할 수 없어서 정말 방법이 없어 죽음의 순간만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 죄를 시인하며 회개하기를 “주여! 저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득죄하였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르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품속에 던져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난 후 도무지 영문도 모르게 병이 낫게 되고 사망 또한 비켜갔습니다. 하나님은 찬미할 분이라며,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며 주님을 위한 뜨거운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뜨거워진 마음은 일 년도 되지 않아 또 식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험이 새로운 유혹이 또 다가오기 때문이며 생각하기에 그래도 재물이 좋고 명예가 좋으며 지위를 좋아하며 또다시 세상에서의 소위 ‘좋다’는 것을 찾고 또 추구합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습니까?
그 속에 빛이 있습니까?
그 속에 희망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눈으로 분명히 보지 못하고 돈을 잡으려 합니다! 명예를 잡으려 합니다! 지위를 잡으려 합니다! 재산을 잡으려 합니다! 사랑을 잡으려 합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잡지 못하며 우연히 조금 잡았다 해도 그 속은 곧 공허함으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큰 어두움 속에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습니까? 적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있습니까?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지 않습니까? 마땅히 자세하게 깊이 헤아려 봐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광야 길에서의 상황과 같은 경우에 처한 것입니다. 오르락내리락, 생활은 안정적이지 않으며 비록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은 항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실 뿐이며, 내 마음에 계시지 않고 내 집에도 계시지 않고 내 일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저 높은 곳에, 오르지도 못할 저 높은 곳에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은 본 적이 있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모셔 내리려 해도 모셔 내릴 수 없으니, 당신의 신앙은 텅 빈 것이며, 유심주의(唯心主義)이며 유심사상이며(Spiritualism 마음은 만물의 본체로서, 오직 단 하나의 실재(實在)라는 화엄경의 중심 사상. 모든 존재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자신 또한 그러한 까닭을 말해내지 못하니 진실로 예수님이 계신 지조차도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나는 예수님을 경험하였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이러한 간증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쉽게 유혹당하고 사람에 의해 눌려 쓰러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유심주의가 맞지요! 미신이지요!” 결과적으로 자신 또한 약해져 버립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계심을 증명할 수 없고 예수님은 진정 존재하며, 살아계시며, 거짓된 분이 아니며, 허황된 분이 아니라는 간증을 하지 못하고, 고난에 승리하지 못하며, 유혹에 승리하지 못하며, 핍박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마지막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론 위에 둘 수 없으며,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다면, 이 신앙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 실현할 수 없고 예수님이 참 구세주이시지만 우리가 지금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여전히 내 질병을 위해 분투하며 발버둥친다면, 인정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돈에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주 공허한 것 아닙니까? 어떠한 작용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하나의 높고 높은 곳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분을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님이며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구해내신 후에 그분은 여전히 우리 마음에 살고 계시며, 우리의 죄를 씻어 깨끗케 하시고 또 계시하시고 또 지도하시며 또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실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숨기며 또 밀쳐 내버리며 또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 중에 예수님을 체험해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주님과의 교제가 없습니다.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하고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약하고 실패하며 간증도 없습니다.
핍박이 다가오면 그들은 두려워하며,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들은 근심하며, 주님을 위한 참되고 살아있는 간증을 할 수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야 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조금도 안정적이지 못하며, 조금도 진실 되지 않으며, 조금의 능력도 없고,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 또한 초라하게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중에 처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예수님을 우리의 일과 생활, 섬김의 제일 앞에 놓아야 하며 직접 체험하고 직접 그분을 경험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의 신앙을 뒤집어엎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에 그렇게도 많은 하나님의 기사를 보이셨기에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간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 우리의 일 중에, 우리의 환경 중에, 우리의 인생 중에, 모두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묘하신 일들을 행하고 계시며 그분의 그 기묘한 일들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루도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의지하면 바로 그 때 실패하게 되니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앙망할 때는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케 해주시며 우리를 데리고 편안하고 순조롭게 어려운 난관을 지나가십니다.
어려움이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임하지만 그 중에는 주님의 아름다우신 뜻이 존재합니다. 주께서는 어려움을 바탕으로 우리를 교육시키시며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후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모두 지나가고, 어떠한 사슬도 끊어질 것이며, 커다란 문도, 벽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섬김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 되고 진실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모두 겪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시며, 그분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어떤 이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웅변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말 허황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진실 되게 경험하였기에 당신은 저의 신앙을 뒤집어엎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많은 참된 성도들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피를 흘렸으며 희생하고 순교하였는데, 어떤 이가 연약하였습니까? 어떤 이가 두려워하였습니까? 어떤 이가 신앙을 부인하였습니까? 신앙을 부인한 사람은 없습니다.
“너희가 만약 신앙을 부인하면 너희를 풀어주겠다.”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으며, 죽음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 그들은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직접 주님의 존재하심을 경험하였고, 주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고, 매 순간 순간마다 그들과 함께하셨고, 모든 일에 그분이 그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참되시며 살아계신 구세주시라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대감독인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86세나 되었는데 로마 황제가 그를 잡아갔습니다.
재판관이 말하길 : “폴리갑 선생!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덕망도 두터우며, 저도 당신을 매우 존경합니다. 지금 황제가 명을 내리기를 모두 황제의 신상을 향해 절하라 하였습니다. 만약 절하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은 보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방법을 하나 주겠소. 당신이 이렇게 연로하고 당신의 인품 또한 이렇게 좋고 사람들 모두 당신을 존경하니 나 또한, 당신이 죽음에 처하는 것을 볼 수만 없으니 당신을 위한 길을 하나 열어 주겠소. 당신이 황제의 신상에 절하지 않아도 되오. 당신이 황제의 신상을 향해 고개만 끄덕거려도 나는 황제께 당신이 신상에 절을 하였다고 보고하겠소. 나는 황제 앞에서 맹세하겠소. 황제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어 당신이 남은 여생을 평안히 보낼 수 있게 하겠소. 내 말을 따르시오!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나 폴리갑 노인은 단호하게 말하기를
“재판관님!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당신의 황제가 아니며, 당신이 믿는 거짓 신도 아니며, 제가 믿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열다섯 살부터 그분을 믿어서 올해로 벌써 팔십 여섯 살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저와 그분은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함께하였으며, 그분과 함께하면 할수록 그분은 저에게 더욱 잘해주셨고, 잠시도 그분과 저는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어떤 일에도 그분이 저를 생각해 주시지 않은 일이 없으며, 어떤 어려움에도 모두 그분은 저와 함께하셨으며, 제가 밥 먹을 때도 저와 함께하셨고, 잠잘 때도 그분은 저와 함께 계셔주셨습니다.
이렇게 좋고 친밀한 친구를 제게 그의 이름을 부인하라 하고, 순간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황제의 신상에 고개 숙여 예를 행하라 하니 이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제는 로마에 있고 저는 서머나에 있습니다. 그는 저의 상황을 모르고 저를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예수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죽여도 좋고, 태워 죽여도 좋습니다. 내 마음에 달갑게 받겠습니다. 죽음이 저를 억압하며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마 제가 죽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저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마 제가 타 죽기 전에 천사께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서 계신 저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법에 따라 처벌하십시오!
태워 죽여도 좋고, 교수형에 처해도 좋고, 목을 잘라 죽여도 좋습니다. 저는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저의 가장 좋은 친구이시며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결국 폴리갑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기둥에 묶어 그를 불태웠습니다. 다리는 이미 타서 끊어졌고 내장도 타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큰소리로 외치며 ”친구들! 여러분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분은 여러분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외치자 그곳에 삼백 여명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있으며 정말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폴리갑의 간증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장렬하고 얼마나 영광됩니까!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얘기해보면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절에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당했고 감옥 안에 갇혔습니다. 홍위병에게 모진 매질을 당했으며 자매들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 거리에서 끌고 다니는 일들이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살하였습니까?
성도들의 신앙을 억압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포기했던 자가 있었습니까? 아마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지요. 그때 성도들의 믿음은 더욱 좋아졌으며 복음의 부흥이 더욱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그것은 확실합니다. 제 말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누구도 우리의 신앙을 뒤집어엎을 수 없으며, 누구도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영혼이 없습니까? 저는 예전 그때의 경험을 빌어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지 한 시간도 더 되었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저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주사를 놨고 어떻게 저를 나무 밑에까지 끌어다 놓았는지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밝혀낼 수 없습니다. 과학자는 밝혀낼 수 있습니까? 의사는 밝혀낼 수 있습니까? 누구도 밝혀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진실한 것이며 육체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을 위해 살지 않고 육체만을 위하여 산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불쌍하지 않습니까?
육체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십 년이 지나가 버리며 늙어버립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했을 때 저는 이미 칠십 세가 넘었고, 머리는 하얗게 새었으며, 기력이 부족하여 어느 때는 몸이 너무나도 피로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쇠잔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쇠잔하여지지 않는 영혼의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영혼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영에 속한 자로서 계획하지 아니하고 오직 육체만을 위한 계획을 한다면, 정말로 매우 불쌍한 것입니다!
옛말에 “금 밥그릇을 들고 동냥하러 다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물을 손안에 들고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고 오히려 불쌍한 거지가 되어 밥을 구걸하러 다니니 다른 이들이 그에게 밥도 주지 않고 또 그를 욕하고 괴롭히고 그를 업신여기니 불쌍합니까? 불쌍하지 않습니까?
크신 은혜는 영혼 속에서의 변화입니다.
육신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며,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된 것입니다. 주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 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물질의 관념에 의지하지 않고, 영에 속한 관점에서 믿음의 눈에 의지하여 영혼의 중요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생긴 후에 비로소 인생관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그들의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조롱을 받고 궁핍하여져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모든 것이 진실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잠시 동안의 순간은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 간증을 하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믿음의 눈을 영혼 위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보다 물질과 육체적인 것들을 중히 여긴다면 이 믿음은 매우 얄팍한 것이며 매우 초보적이고 매우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먹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입을 수 있겠습니까?
몇 개의 방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공허한 것입니다! 영혼은 영원하고 영원한 것이며 영혼의 유익은 육신의 향락과 비교하여 몇 배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얕은 은혜만 조금 원하며, 매일같이 광야의 생활을 보내며, 이리저리 표류하고 마지막에 가나안에도 들어서지 못하며 안식을 얻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거하며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분부하여 말씀하시길 “너의 백성들을 일으켜… 싯딤을 떠나 유숙하였다가 요단강을 건너 저곳으로 가서 약속한 아름다운 땅을 얻으라”
다시 말해 광야에서 표류하는 생활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큰 안식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먹어보았고, 그는 누려보았으며, 경험해보았으니 세상의 어느 왕도 솔로몬 왕처럼 그렇게 누려보지도 지혜를 가져보지도 못했습니다. 전 세계의 왕들이 모두 그를 존중하며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았지만, 그는 마지막에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보았으며,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어보았고, 몸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누려보았으나 마지막엔 모두 헛되도다 하였으니 안타깝습니까?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가 노년에 이를 때까지 한 가지 일만은 헛되지 않다 하였으니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경건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일생 동안 더듬어가며 이 길을 찾은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나 구원을 얻은 그 날부터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 주님과 우리는 생명의 관계이기에 진정 기쁘며 진정 평안하니 인생이 그야말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최고의 인생은 바로 새로운 생명으로 하여금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서서히 성장할 때는 세상에 부딪힐 수 있고, 물질적인 것에 부딪힐 수 있고, 인정(人情)에 부딪힐 수 있으며, 어느 때는 이것들과 부딪히며 새 생명이 억압받아 옛 생명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경쟁, 투기, 근심, 자신의 계획, 이러한 것들이 세상의 것들과 부딪히면 모두 쏟아져 나와 버립니다. 서서히 다시 세상을 탐하며 또 범죄하고 또 세상 사람들과 같은 줄에 서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좋은 곳에 가서 거하지 않고 쓰레기 더미 안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오직 육체의 즐거움과 이익만을 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일어나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하신 땅에 도달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며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왔습니다.
우리는 홍해도 이미 건너왔으며, 분명히 자신은 이미 구원받고 거듭났음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승리하였습니까? 승리하지 못했습니까? 생명이 풍성합니까? 풍성하지 않습니까? 궁핍하고 안타깝습니까? 아직 광야에서 표류하고 있습니까?
광야 길의 생활을 끝내고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갑시다!
음란한 싯딤 땅을 떠나라
어떻게 요단강을 건널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길 “여호수아가 이른 아침 일어나 백성들과 함께 모두 싯딤을 떠났다.”라고 했습니다. 싯딤은 광야 길의 가장 마지막 정거장이었습니다.
‘싯딤’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었습니까?(참조:민25:1~5, 수13:22, 민31:16) 이것은 싯딤에서 발생했던 음란한 사건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광야에 가장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하였지만 여전히 이렇게 실패하였습니다.
왜 실패를 하였습니까?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 발람이 그때 모압 왕 발락의 뇌물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초대되어 갈 때 그는 여호와께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민 22:12)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발락을 돕지 않았습니다.
발락은 두 번째 사신을 보내어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말하길 “누가 너를 막아 와서 나를 돕지 못하게 하느냐?” 하였습니다. 발람은 그렇게 많은 금은보화들을 보고는 마음이 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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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호와께 구하길 “제가 마땅히 가야 할까요? 가지 말아야 할까요?”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 찌니라”(민22:20)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의 마음은 이미 금은보화에 빼앗겼으니 다시 나에게 물어도 헛된 것이며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그냥 가거라”라는 것입니다.
그가 간 후에 서너 차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하였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이에 발락이 노하며 말하길 “내가 너로 복을 얻으려 하였거늘 너로 인해 복을 얻지 못하니 너는 돌아가라!”라고 하자 발람은 발락의 체면을 구겨버린 것을 미안해 하여 발락에게 한 가지 방법을 내어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 실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패합니까? 미디안 여자들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하는 것, 그들이 죄를 범하면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처벌하실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실패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여 스스로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발락은 곧 많은 숫자의 모압 여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범죄 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므로 하루 동안 2만 4천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싯딤 지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려 한다면 반드시 제일 먼저 싯딤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몇 년을 믿은 사람이든 모두 하나같이 얘기합니다. “광야의 표류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싯딤을 떠나지 않으면 요단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으며 곧 실패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풍성한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항상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싯딤을 떠날 때입니다. 싯딤은 정욕의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죄는 가장 승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팔십 삼세나 된 나이 많은 주님의 종이 저에게 별안간 부끄러워하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욕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나이든 종이고 이미 여든 살이 넘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말하길 “당신은 모릅니다. 백세를 살아도 여전히 정욕의 충동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이 독계(毒計)를 사용하여 정욕을 미끼로 여러분들을 쓰러뜨리려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입어 여러 지방을 다녔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모두 말하길 “우리의 동역자 모모씨가 제 칠 계명을 범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일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이들이 미디안 여자들에 의해 쓰러지고, 싯딤에서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심지어는 여호와께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왜 승리할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싯딤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싯딤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욕을 끊을 수 없으며 정욕에 의해 묶여버리고 맙니다.
동방번개(중국의 이단종교 이름)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들은 사교이며 이단을 넘어섭니다. 그들은 말하길 “여(女) 그리스도가 이미 지상에 강림하셨으니 은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니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이미 왕이 되셨으니 천국이 이미 실현되었다.”
이것은 명명백백히 이단의 사악한 말이 분명한데 왜 그들은 이토록 부흥하며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두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금전적인 것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매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청년일꾼을 에워싸고 많은 돈을 주어 그들을 유혹하여 자기들을 따라오게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색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청년일꾼이라면 당신에게 예쁜 여자를 붙여주고 그 여자는 이단 신의 연고로 당신을 섬기며 서서히 당신을 끌어들입니다. 만약 젊은 자매라면 당신에게 괜찮은 형제를 소개시켜주고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많은 청년일꾼들을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유혹을 받은 것을 인정합니다. 주된 요인은 우리 마음속에 마귀에게 허점(틈)을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점이 없었다면 그는 우리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단히 지켰다면 그 또한 우리를 함부로 공격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공격한다 해도 공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허점이 있고, 세상을 향한 것들이 아직 죽지 않았고, 정욕을 향한 것들이 아직 죽지 않았기에, 아주 쉽게 사탄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며 싯딤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정거장의 여정만을 남겨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른 아침 일어나 싯딤을 떠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오늘 우리가 진정 요단강을 건너고자 한다면 반드시 일어나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떠납니까?
첫 번째 “여호수아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두 싯딤을 떠났다.”에서 그 ‘이른 아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이른 아침의 시간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릇 영혼이 깨어있는 사람 중에 아침에 늦잠 자는 사람은 없으며 모두 아주 일찍 일어나 영적 수양과 기도를 합니다.
성경 속에 묘사되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여호수아 및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이른 아침 일어나 여호와를 찾았으며 이것이 바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좋지 못한 주요 원인은 모두 아침에 게을러 일어나지 못한다면, 분명히 연약하여 실패할 것이며 시험에 부딪히면 곧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아침에 사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아침에 사귐이 잘되면 하나님과의 기도도 매우 잘 통할 것이며, 시험이 닥쳐와도 쉽게 승리할 것이며, 어려움이 와도 쉽게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주님과 연합하였기에 주께서 분명히 힘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있는 일꾼들이 아침에 사귐 할 줄 모른다면 그들을 잘 인도할 수 없고, 빛도 없을 것이며, 더욱이 능력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과 가까워질 때 비로소 빛을 얻을 수 있으며, 아침이 바로 제일 좋은 시간입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길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세운다.”라고 합니다. 아침에 허둥지둥 정신이 없다면, 하루 종일의 일은 거의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특별히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이른 아침의 보배로운 시간을 잘 이용할 줄 알아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른 아침 일어나 여호와를 찾았으며, 여호와께서는 곧 그를 향하여 은혜 베푸시는 손을 뻗어주셨고, 그의 범사가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 영에 속한 매우 많은 사람들도 우리에게 알려주길 능력 얻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도 이와 같이 새벽이 밝아올 때면 일어나 광야로 나가 기도하셨고, 날이 아직 밝지 않았을 때 그분은 일어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여전히 이렇게 이른 아침의 시간을 중요시 여기셨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옛 천성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려움이 있으면 목숨을 다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지나가고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할 때면 곧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며, 일이 닥쳐왔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성경을 보고 기도제목들을 늘어놓지만 일이 끝난 후에는 곧 또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능력이 있어서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고자 한다면 즉시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경건하게 기도하십시오!
충성스럽게 기도하십시오!
댓가를 치르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해보십시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 삼 일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영혼이 어떻게 되며, 생활이 어떻게 되는지,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히 크게 좋아질 것이며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일 밤과 낮이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하시려고 만드셨을까요? 아침은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신 것이며, 하루의 시작에 먼저 하나님과 사귐하며, 먼저 하나님과 대화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권능으로 우리를 주장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다시 사람들과 접촉한다면 모든 생활과 일, 섬김이 모두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일년 365일 중에 하루도 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일어나 제일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혹은 구석에서, 혹은 정원에서, 혹은 은밀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셨으며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어떨 때는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활은 아주 경건하였습니다. 제가 그분이 생활하셨던 것을 회상해보면 그분이 실패하신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약한 모습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고, 승리하는 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먼저 아침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서 그냥 대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태도의 문제입니다. 마땅히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제일 첫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주여! 당신께서 시간을 저에게 주셨는데 제가 마땅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만약 잘 살아가지 못한다면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제 자신을 당신께 바칩니다. 하는 일에서도 저를 도와주시고 저로 연약해지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지 않게 하시며, 섬김에서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물들지 않고 저의 마음으로 하여금 매 순간 순간마다 모두 당신께 중점을 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할 일을 모두 주님께 기도드리면 주께서 우리가 시험에 덜 들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며, 혹은 시험을 면해 주실 것입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임한다 해도 시험을 승리할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라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구체적으로 말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싯딤을 떠나고, 요단강변에서 거하며, 그곳에서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승리를 얻는 것은 하루 이틀에 잘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하루 중에 아침과 저녁에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한두 번 모임에 부흥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이 일시적인 승리와 부흥이 며칠이나 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삼일, 오일, 한 달, 두 달도 가지 못할 것이며 아마 한 주도 가지 못해 냉담해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바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열흘을 기다렸고, 성령께서 곧 그들에게 강림하시어 그들은 크신 능력으로 주님을 위하여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반드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느낌이 없고,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는 기도하지 않게 되고, 마음속에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되며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 동안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을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정말 이렇게 뜻을 세우고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뛰지 말고, 마음속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움직이지 않으며, 계속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의지로 성경을 읽고, 이러한 마음의 의지로 찬송을 부르며 아침의 시간을 완전히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성경을 읽고 시편을 읽습니다. 한편으로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기도를 하면 바로 마음은 안정이 됩니다. 마음이 평정되면 곧 빛이 오고 능력이 옵니다.
하루를 지내면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마치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조급증을 갖지 마십시오. 잠시 기도하고, 생각이 복잡해지면 곧 일어나 기도하지 않고, 혹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기도는 두어 마디하고 그만 둔다면 그것은 기도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시간을 바쳐서 내어놓아야 하며 이것은 내 임의대로 남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당신께 경배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저의 생명은 당신께서 주신 것이니 저는 당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제가 아침에 당신께 경배드리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당신을 경배하겠습니까? 눈을 뜨면 바로 돈 벌어 부자 될 생각만 하며, 어떻게 계략을 써서 다른 이들과 왕래할까를 생각하는데 어떻게 영혼이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표류하는 광야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실패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여! 이 새로운 하루가 와서 당신께서 저에게 새 힘을 주시도록 제가 당신 앞에서 기다리오니 당신께서 저의 영혼과 생명을 누르시어 저와 당신이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이렇게 주님과 사귐을 한 후 다시 다른 일들을 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라
여호수아가 또 선포하기를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매고 앞서 걸어가고 백성들은 언약궤를 따라 가라고 하였습니다. ‘언약궤’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예표입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면 성령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실 것이며 언제나 감동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모든 일들은 모두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며, 재물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니며, 주님께 순종함으로 하는 일입니다.
제가 감옥에서 나오고 난 후에 5년 동안 사회에서 일할 때, 그들이 저를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저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병원 청소 일을 시켰습니다. 매일 매일 매우 바빴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인도해 주시어 저는 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도하였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면 저는 주님 앞에 잠잠히 말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맡겨진 일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는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가서 일했으며 또한 아주 잘 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도 교사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지도해 주실 것이며 우리를 이끌어 모든 진리 안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면 주저 말고 조용히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며,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며, 마땅히 어떻게 말해야 하며,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성령께 순종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면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세 가지 기본
그리스도인이 성령께 순종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 가지 기본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 기본을 잘하고 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첫 번째 기본은 기도할 줄 아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진실 되게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당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당신의 실패와 연약함도 모두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에 큰 능력을 보이시며, 당신이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당신을 환란에서 건져내시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지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도록 구하여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향해 많이 기도하므로 주님께서 평안을 당신에게 주시며, 길을 형통하게 하시고, 당신께 도움을 주시며,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 모든 시험들을 승리하게 하시며, 더욱 더 깊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귀 기울여 들어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범사를 성경에 따라
두 번째 기본은 바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은 성경을 벗어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사람에게 계시해주시는 것은 성경을 떠날 수 없습니다.
무릇 성경과 맞지 않는 감동과 계시는 모두 믿지 마십시오.
무릇 성령의 말씀이면 모두 성경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가 있는 말은 그대로 가서 행하십시오! 행하면 곧 형통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이 너무나 많고 이러한 간증 또한 너무나 많기에 여기에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범사에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면 가는 모든 길은 안정적이지 못할 것이며,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은 진실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들은 모두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들이며,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매 구절마다 모두 능력이 있으니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특별히 전도자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무엇을 전할 것이며, 무엇을 말할 것입니까? 성경에 대하여 익숙지 않은데 무엇을 근거로 설교한단 말입니까? 그저 개인의 경험만 말한다면, 물론 비록 전할 수 있겠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비로소 진리의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신앙은 곧 기초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시험에서 승리할 능력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를 이기셨으니 하물며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이며, 생명이며, 진리입니다.
세상의 어떤 학문도, 서적도 모두 성경보다 클 수 없습니다. 일생 중에 성경을 백 번 읽어도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것만도 이미 백 번이 넘었지만 저는 여전히 너무 적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앞을 읽고 지나가지만 뒤에 가서는 또 잊어버리기 때문에 또 다시 읽어야 하며 매일 매일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잡아내어 읽으려고만 한다면 매일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 사십 장을 읽는다면 한 달이면 한번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면 어렵지 않겠지요! 40장의 성경을 읽는데 한 시간 좀 넘는 시간이면 됩니다. 이러면 할 수 있겠지요! 일 년에 한번 읽는 것이 아니며 12번은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12번 읽고 난 후에 성경에 있는 도리는 기본적으로 모두 익숙해졌다면 영혼은 자연적으로 굳세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는 기본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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