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세 가지 (7)
이천은(李天恩)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이나 훈련받으며 광야의 길을 걸어야 했던 목적은 그들의 옛 본성을 제거해버리기 위함이었으며, 옛 사람을 광야에서 장사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훈련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내 안에는 선함이 없고 나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왜 나를 구원해주셨습니까?
나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몸과 영혼이 강건하여서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설 수 있고, 거침없이 쳐들어가 승리하는 전쟁을 치룰 수 있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만약 광야의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자신의 타락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곧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애굽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400여년을 지냈지만 한 번도 제사를 드린 적이 없었으며 또한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제사 드리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므로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셨던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 속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분을 우리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값없이 이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게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 아니며 그것은 그분의 예지와 예정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려 하신 것입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참고:롬9:8~14)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필히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며, 우리 마음의 눈을 여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하셔서 곧 우리에게 생명의 변화가 있도록 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제 자신의 경험에서 말한다면 제가 은혜를 입음은 제가 추구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부모님의 간절한 바램 때문도 아닙니다. 부모님은 비록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바라는 것이 또한 저를 그 생명 안으로 데려다 놓을 수는 없으며, 저로 하여금 거듭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 임하여 제 자신을 철저히 다 드러내셔서 제가 이렇게 타락한 인간임을 알게 하시면 저는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제가 어찌할 줄 모르며 “누가 나를 구해 줄 수 있나요?” 라고 외칠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성령님은 저를 불쌍히 여기사 나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보게 하시고, 그의 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의 불의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저는 그때야 비로소 십자가가 무엇인지, 구세주가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찰라 가운데 저의 생명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여! 당신은 진정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저는 비로소 생명의 길을 인식하였고, 비로소 성령님께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새 생명의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었으므로 비로소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굶어 죽어도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가서 밥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며, 고단하여 죽을 것 같아도 나는 다시 인정을 구걸하며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기개가 아니며 하나님을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을 가기 원하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면 모두 기쁨으로 순종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품으면 곧 평안해지고 저의 삶 속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간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안정이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교회 안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간증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춰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생각할 때 본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말입니다. 우리의 온화함과 겸손함과 인내, 그 모두가 그들에겐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며 생명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며 생활 속에서 간증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비로소 나아갈 길이 있으며 비로소 부흥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자매들이 모두 빛을 보았기 때문이며 빛 가운데 걸어가며 주님을 인식할 뿐 아니라 자신 또한 인식하며 더욱 이 세상을 인식하였기에 성령님께 순종하며 편안한 새 생명의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성도가 교회 안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관찰해 보십시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단지 전도자의 설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큰 은혜에만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이 형제자매들이 교회 안에서 부흥될 때 어려움과 가난함을 기꺼이 원하며 진리를 배반하기 원치 않을 때 이 교회는 간증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곧 이런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여 흑암과 같은 세상을 비추시며 사람들의 마음의 흑암을 밝히시며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흑암 중에서 빛을 향해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하면 구원 얻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교회로 올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증거해 주심도 지속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활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고 난 후, 신명기의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만약 홍해를 건너지 않고 육지로 건너갔다면 11일이면 허락하신 아름다운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말씀에서 또 말씀하시길 하나님께는 그들이 전쟁을 치루지 못하지나 않을까, 또 전쟁을 만나면 낙심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염려하시어 그들을 홍해 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들이 길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여 곧 병사를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앞에 두고 뒤로는 병사들이 추격해오고, 좌우로는 높은 산이 막고 있는 험준한 곳이었으니 그들에겐 죽는 길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끝.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자리에 놓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막다른 골목의 생활을 지나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영원히 견고해 질 수 없습니다.
막다른 길을 지나고 난 후 사람의 방법, 사람의 지혜, 사람의 재능이 모두 쓸모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시하시기 시작하셨고 모세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모세야! 네 손의 지팡이를 뻗으라.” 하셨고 홍해가 갈라져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른 땅을 지남과 같이 홍해 가운데를 지나 건너갔습니다.
애굽 사람들도 또한 지나가 보자 하여 그 가운데로 가보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뻗으라.” 하셨고 홍해의 물은 다시 합쳐져 애굽 사람들을 모두 홍해 물속에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이때 그들은 큰소리로 찬미하였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미리암은 북을 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모두 매우 기뻐하며 영원히 구원을 얻었다! 다시는 애굽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하며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아무리 연약하고 아무리 실패한다 해도 여전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때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얘기하자면 더 이상 연약해진다 해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큰 전환점을 지나고 나서 다시 광야에서 표류했으나 다시금 애굽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의 하루는 옛 본성을 버리지 못하였고 이틀, 일년이 지나도 옛 본성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이년, 십년이 지나도 옛 본성을 버리지 못하였고 20년, 30년, 40년이 지나 마지막에 와서야 옛 생명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새 생명이 자라난 후에 곧 거침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진정 다시 태어남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후에 또 주를 부인하며 믿지 않는 것을 저는 제 오십 여년 동안 주님을 따르는 생애 가운데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다시 마귀에게 빼앗겨 멸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연고로 곧 그 하나님의 ‘영원히 쇠잔하지 않는 영생’ 을 얻었습니다. 어느 때에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어느 때에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어느 때에 진심으로 믿으며, 어느 때에 영생을 가질 수 있으며, 주님과 우리 가운데 끊을 수 없는 생명의 관계가 세워집니까?(참고: 요일 5:12, 요 3:16~18,36 요 10:28~29)
우리는 실패할 수 있으며 약해질 수도 있으며, 또한 언제나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보혈을 흘리시어 우리를 다시 사오셨으며 또한 영생을 선물로 주셨으니 그분이 우리를 관리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또 마귀에게 우리를 빼앗기시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굽의 자극적인 즐거움을 거부하고 주님과의 교통을 많이 사모하자.
아쉽게도 현실 생활 중에 우리는 한번 실패하면 곧 약해지고 낙심하며 ‘역시 애굽이 좋지’하며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애굽에는 오이도 있고, 마늘도 있고, 양파도 있고… 조미료도 있으며 여러 가지 자극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참 양식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TV를 보고 비록 즐거워 하지만 그것들은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허영된 명예는 그때 잠시는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마늘만 먹으면 몸을 살찌울 수 있겠습니까? 몸을 살찌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먹으면 먹을수록 몸은 마를 것입니다. 자극적인 것은 영양이 없으며 영양이 있는 것은 자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자극적인 것을 찾고자 한다면 한번 열심히 찾아보십시오. 마늘은 먹을수록 배고프게 되고 내 몸은 점점 더 말라갈 것이며 어느 날이 되면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극적인 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손해보고 세상에 사기를 당할 것이나 그것을 알고 난 후에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와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만나를 우리에게 내려 주시고 영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는 비로소 점점 강건해지며 자라나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진정 다시 거듭나 구원을 얻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사람은 다시는 세상의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탐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만약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익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쩌다 조금의 이익을 얻게 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놔두시지 않고 사탄도 눈이 벌게져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거늘 왜 내 덕을 보는 것이냐!”
사탄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그는 더욱 우리를 수치스럽게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익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사업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서로 힘을 합쳐 일하고 서로 하는 말들도 허울 좋은 번지르르한 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돈을 벌어 손에 쥐고 나서는 곧 사심이 튀어나오고 눈이 벌게져서는 “당신이 감히 내 돈을 가져가려고 하다니, 네가 뭔데?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며 모진 마음을 먹고는 그 사람은 이 형제를 죽여버렸습니다. 불쌍합니까? 불쌍하지 않습니까?
제가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는 마땅히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따라 가야하며 의지를 세워 영원히 주를 따라 걸어가야 하며 뜻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걸어갑시다!
다시 애굽을 생각지 맙시다! 애굽은 노예의 땅입니다.
먹는 것이 좋고 입는 것이 좋지만 그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마귀는 마음껏 우리를 괴롭힐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우리를 조롱하며 우리는 복음의 간증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형제들이여!
주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갑시다!
광야에 마음을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광야 생활은 힘듭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아름다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의지를 세우고 광야를 지나 아름다운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풍성하고 그 모든 것이 은혜이며 영광입니다.
예수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이미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하늘에 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기꺼이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이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육신이 좀 고통 받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외로워지는 것도 별 것 아닙니다.
세상의 길이 좁아지는 것도 별 것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십자가의 길은 가면 갈수록 밝아지며, 가면 갈수록 윤택해지며, 가면 갈수록 주님과 가까워지며, 그럴수록 주님의 은혜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정 은혜가 가득하고 은혜에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절대 고통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시기 힘드십니까? 사실 힘듭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이르면 그것은 더 이상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을 때야말로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는 힘들지 않습니다. 마치 그 고통당하신 연세 많으신 자매님의 간증처럼 “십자가는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정말 두렵고, 그 앞에 가서도 여전히 방법이 없었으나 지고 나니 그런 것이 아니더라구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며 광야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들어간 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떻게 섬기죠? 그들은 그때 당시엔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가라고 하신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걸어갔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일이 없었고 계속해서 나약하였으며 실패하고 원망하였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생명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중에 데려다 놓으신 목적은 그들이 학습과 훈련을 통해 옛 사람을 처리하여 광야에서 쓰러뜨려 죽여버리고 마침내 새로운 생명으로 드러나게 하셨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변화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나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이 세상을 보지 말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소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란 우리가 부러워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어쩌다 좀 얻게 된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며, 어쩌면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잃게 하고 더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들을 추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럴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가서 뽐내라! 너희들은 가서 마음껏 즐겨라! 우리는 그것들을 향유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진정으로 누릴 것들이 아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교제야말로 진정 우리가 누릴 것이며, 성령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자유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다.”
우리가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경멸할 수 있으며, 세상을 무시할 수 있으며, 세상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애굽아! 우리는 너와 관계가 없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왔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광야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다시 실패한데도 더 이상 애굽에 속하지 않는 이미 선택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은혜로 대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주님께 구해야 하며, 우리에게 밝은 빛의 계시를 주시므로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할지 보게 하시며, 어떤 것이 생명의 성장인지를 보게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애굽을 나와 다시 태어나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아직도 애굽을 흠모하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사람의 정과 허황된 명예 같은 것들에 연연하고 있습니까? 연연해하지 마시고 고개를 들어 그리스도를 앙망하며 앞으로 갑시다! 비록 앞은 망망한 광야이지만 괜찮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길이시고, 주께서 생명이시고, 주께서 진리이시며, 주께서 우리의 지표이십니다.
광야가 아무리 아득해도 우리가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방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틀린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길은 더 뚜렷하며, 가는 걸음에 더 능력이 있으며, 그 속에는 더 밝은 빛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지표가 되시며 그분이 우리를 인도해주셔서 광야의 세월을 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풍성함을 누리고 그분의 영화로우심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동행을 추구하고 생명의 성장을 추구는 것,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교제하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얻고, 능력을 얻으며, 생명으로 하여금 더욱 더 건강한 성장을 하게하려 함입니다. 우리로 하여 이 십자가의 길을 분명히 보고 빨리 뛰어 좇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 들려갈 날이 정말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인자께서 이미 문 앞에 서계십니다.
우리가 만약 급하게 달려 나아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뵈올 때 부끄러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자가 언제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오늘날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 이쪽에서부터 저쪽까지 육지부터 바다까지 모두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함이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며, 주 예수님의 징조를 들어맞게 하려 함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가 최후의 때가 다다랐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새 예루살렘이 곧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며 가장 큰 기쁨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이 소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 소망을 영접해야 할까요? 어떤 마음으로 그 날이 오심을 기다려야 할까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은 졸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물질의 풍요로움과 육체의 안락함만을 찾고 있고 세상에서 좋은 날 보내기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이며 우리의 집은 하늘 위에 있습니다. 하늘 위 뿐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길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이 얼마든지 맞는 것이며 비록 허락하신 것이 조금 들어맞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의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한 걸음 한 걸음 맞추어질 것이며 점차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렇게나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며 방향과 목표가 있으며, 뜻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있어도, 아무리 지위가 있어도,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그의 인생이 돌아갈 곳을 자신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이 영원히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들을 모두 묶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웅호걸도, 어떤 성인(聖人)도, 어떤 학자도, 모두 “나는 죽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죽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죽음’ 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학자는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며, 철학자도 그것을 연구해내지 못하며, 정치가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들이므로 ’죽음’에 관해 훤히 알고 있습니다. ’죽음’ 이란 사람의 끝이 아닙니다.
“사람의 죽음은 등이 꺼짐과 같고 한번 꺼지면 곧 끝이다.” 라는 말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란 하나의 관문에 불과하며 사람이 이 관문을 지나고 난 후 저쪽 편에 다다르게 되고 또 아주 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오묘한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며 또 어떤 이들은 고의로 부인하며 말하기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 이래 아주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였고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죽음의 뒤편에는 또 아주 길고 긴 길이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비단 길고 긴 길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더 힘들고, 더 위험하며, 더 처참한 길이 있으며 누구도 이 관문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미를 올립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의 권세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의 갈고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 갈고리는 바로 죄이며 죄의 권세는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인(聖人)들도 하지 못하는 것이며, 철학자들도 하지 못하는 것이며, 더욱이 정치가와 교육가들도 하지 못하며 과학자들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현재의 시대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입니다. 과학의 발명은 정말 놀랍습니다. 생활의 필요적 시각에서 말한다면 과학의 발명은 이미 예전의 많은 시대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날에는 해내었습니다. 하늘 위를 보나 땅 위를 보나 모두 그렇습니다.
사람이 비록 이렇게 총명하나 여전히 생명의 오묘한 비밀을 해석해 내지 못하며 더더욱 죽음 이후의 오묘함을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생명이라 하며 무엇을 죽음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 또한 자신의 생명을 주관할 수 없으며 또 죽음의 권세를 벗어날 수 없으니 사람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과 같이 어리석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빛이 있으므로 더 이상 어둠 속에 걷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므로 곧 방향과 목표가 있고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구원을 얻기 전의 인생은 대충 대충이었으며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고 오늘밤도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으며, 내년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므로 성경을 통하여 내일은 어떻고 모레는 어떠하며 장래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문학가의 상상도 아니며, 성경에 생명의 빛으로 말미암아 뚜렷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성경은 사람의 지혜로 쓴 것이 아니며 철학자와 문학가가 꾸며 쓴 것도 아니고, 종교가가 상상해내어 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하심으로 쓰인 것입니다.
계시란 무엇입니까? 이 도리는 사람이 알지 못하며 이해도 못하며 더욱이 생각할 수도 없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뚜껑을 여시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오묘한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이 관문도 하나님의 계시 없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든지 어리든지 모두 훤히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뚜껑이 열리면 곧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생명이시며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면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마음속에 분명하게 되니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보배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돌보아주시며 인도해주시며 보살펴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런 문제들과 이런 진리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경험해 보셨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흐려진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눈을 뜨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빛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구원을 얻은 그날부터 눈은 이미 뜨였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하며, 내가 왜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는 눈으로 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감각만 사용하여 더듬습니다.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둥에 부딪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벽에 부딪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또 머리를 부딪혀 다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들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눈을 뜨고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표임을 보십시오!
생활 속에서 일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본다면, 그렇게 많은 경쟁과 질투도 그렇게 많은 근심과 걱정도 그렇게 많은 두려움과 의심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이며 이 신앙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를 핍박할 수도 있고, 나를 모욕할 수도 있으며, 나를 비방할 수도 있고, 나를 감금할 수도 있으며, 칼로 나를 죽일 수도 있으나 나의 신앙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리의 신앙이 아니며 전통적인 사상의 의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리가 아무리 좋고 권세가 커도 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질병, 내 인생의 아픔, 나의 마음속의 공허함, 내 죄악의 매임,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역시 틀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묶었던 사슬은 끊어졌으며, 무거운 짐도 내려놓았고, 병이 치유되며, 더 이상 인생을 비관하지 않으며,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도리가 저를 이토록 부흥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말씀이 저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그분의 말씀이 제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빛 가운데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또 길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은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계시며,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형제자매들과 교제할 때 우리에게 임하시며, 성경을 읽을 때 우리에게 임하시며, 영적인 서적을 읽을 때 우리에게 임하시며,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시며, 교육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아직 빛 가운데 걷지 못하며 눈을 감은 채로 이쪽저쪽을 더듬거리다가 부딪혀 찢어지고 피가 흐를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여!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또다시 죄를 범하지 않고 당신께 득죄하지 않겠으니 당신의 징치(懲治)하시는 손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돌아가 완전히 순종할 때 어려움은 곧 물러가고 고통이 없어지며 문제도 해결됩니다. 이때 마땅히 하나님과 함께 하며 성실히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걸어가게 되고, 앞을 내다보지 않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부딪히게 하시거나, 아니면 부딪혀 상처입게 하시며, 또는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한번 또 한번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이름으로만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면 또다시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 이미 이 십자가의 길은 옳은 것임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 또 이렇게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함부로 대담하게 죄를 범하지도 못하며, 마음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가면 두 걸음 물러서고 잡아끌어 당겨도 여전히 앞으로 가려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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