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 보좌 앞의 나(13)
교회와 내 주님 보좌 앞의 삶
F.J. 휴겔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살 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세계는(실제로는 바르게 되는 것이지만) 완전히 뒤집어진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신학 교리를 확립하고 보좌 앞의 삶에 대한 원리를 풀어내었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교회를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고 정의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여기서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관 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님의 보좌권을 시행할 때, 우리는 교회를 영적 유기체로 바라볼 수 있는 바른 눈을 가지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교회가 교파와 상관없이 성령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특정 교파에 충성하면 주님의 보좌권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교파나 출생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교파의 모습을 버릴 수 없으며 버릴 필요도 없다. 교파는 우리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나라와 이름과 믿음과 관행의 동질성을 따라 수많은 기독교의 교파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성경적인 생각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이는 단지 이름이나 외형적인 면에서 같아지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으로 여기신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십자가를 근거로 하나가 되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주께서 모든 원수 되었던 것을 소멸하시고 화목을 이루신 것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도 십자가에서이다. 분열의 모든 이유를 제하시고 육신으로 오신 주님께서 막힌 담을 허무신 것도 십자가에서이다. 여기서 막힌 담은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다. 주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당신 안에서 ‘한 새사람’인 교회가 되도록 하신 것도 십자가에서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성령으로 성전을 새롭게 하시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다) 유대인과 이방인 뿐 아니라, 루터교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감독교인, 제자교인, 사순절교인들로 ‘한 새 사람’인 교회를 이루도록 하신다. (종교만큼 분열이 심한 곳도 없지만)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다리를 놓고 모든 분열의 요소를 씻어내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고, 반목하는 집단들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든다면, 십자가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들추어내는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나누어지는 것을 이용하려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사악한 무리들과 교제해야 하거나 이단과 연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하신 말씀의 권위를 근거로 볼 때, 분열은 죄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죄는 육이며, 세상이며, 마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연합을 꾀하시고, 마귀는 분열을 꾀한다.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문제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구속의 본질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구원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도저히 화해하지 못할 정도로 갈라지는 것은 죄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십자가에서 베푸신 주님의 구원은 사람의 화목이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그 다음은 사람들과의 화목이다.
사도바울은 몸도 하나이며, 믿음도 하나이며, 주님도 한 분이시며, 세례도 하나이며, 하나님도 오직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한다.(에베소서 4장) 사도바울은 성도가 온전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잇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가장 위해한 기본 조건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고자 한다면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전함의 핵심은 ‘성도의 교제’에 있다. 성도의 온전함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관한 문제이므로 우리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으며,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모든 진실된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며 믿는 것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온전해 진다.
교회와 온전히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 보좌 앞의 삶을 사는 영광에 참예해야 한다. 불화하며 사는 것은 사람을 무척 힘들게 한다. 교파 간의 다툼은 참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교회는 다툼이 없다. 교파 간의 다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북극곰이 적도에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교파 간의 다툼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참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 부모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한 가족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몸인교회가 세움을 입고 확장되는 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뒤로하고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것을 우리의 일처럼 기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몸에 채우기를 기뻐한다고 했다.(골1:24)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보좌를 함께 할 때, 우리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우리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리하면 파벌은 크신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 묻혀버린다. 주님은 교파 나름의 프로그램을 중히 여기지 않으시므로, 우리도 그런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교회 전체를 마음에 품으며 살고, 교회의 완성을 소망하며 이를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든 지체를 위하여 탄식하며 신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피부색과 이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전달해야 하듯이, 중보기도도 내 교파, 내 나라, 내 민족에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실족하지만, 십자가를 근거로 내 주님 보좌 앞의 삶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자아의 삶은 사라진다. 자아의 삶은 갈보리의 완성으로 사라진다. 보좌 앞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다. 우리가 내 주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의 보좌의 권세를 많이 누릴수록, 십자가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더 크게 역사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의 부활의 권능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심으로 본받는 자가 된다.(빌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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