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박정희 기념관 건축?
미국은 국력의 자랑에 있어서 실체와 상징적 표상이 많다. 국방력, 경제력, 초당(超黨)적 정치/사회문화, 메모리얼 랜드마크 등등 헤아릴 수 없다. 그 중에 하나를 지난 여행 중 방문했다. 미국 4명의 대표적 대통령 얼굴이 바위에 새겨진 “마운트 러시모어(Mount Rushmore)"가 그것이다. 이 메모리얼 바위산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의 업적만 나타난 게 아니 미국의 초당적 정치문화도 새겨져 있다. 오늘은 이 메모리얼 랜드마크를 소개하며 그 안(內)에 새겨진 뜻을 통해 한국의 정치문화를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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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랑
미국의 자랑은 단연 국력이다. 그러나 더 자랑스러운 게 있다면 도서관의 대중 저변화를 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퇴임한 대통령들의 기념을 위하여 메모리얼 라이브러리나 박물관이 존재하는 게 참 보기 좋다.
우리나라엔 그러나 대통령 기념도서관이나 박물관이 아직 없다. 특별한 공을 세우고 그 공을 세울 만한 대통령이 미국의 역사와 달라서 그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공(公)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대통령은 그 특정 대통령의 추종자들에게만 위대한 대통령이지 과거에 그 대통령을 반대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타도의 대상만 된다.
이런 극단적 현상은 박정희와 김대중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이 인정하는 업적을 이뤘는데도 박정희는 자칭 민주화 인사라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지 않고, 김대중은 지역감정과 남북의 정치 이데올로기 관(觀)에 의해 호남을 빼놓고 다른 곳에선 넓은 지지층이 없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 비록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구도로 몇 세기를 보냈어도 과거에 상대편에 선 정당의 대통령이 업적을 이뤘으면 그 사람의 업적을 인정하고 날이 갈수록 정적의 업적에 대한 가치를 더 알아주는 예 허다하다.
대표적 예가 에이브라함 링컨이다. 공화당은 1854년 처음 창당되었고, 링컨은 최초의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됐다. 그는 노예로 해방을 외치다 혹독한 남북대결이라는 전쟁까지 치렀으며 전쟁 후 노예 해방에 대한 남북 갈등 암살됐다.
링컨의 암살은 남부지방으로부터의 태동된 것이고 민주당은 남부에 동조했다. 링컨은 그러나 오늘날 남부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다. 민주당원이건 공화당원이건 링컨의 업적 인정에 있어서는 초당적임이 증명된다.
민주당 출신의 FDR(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대통령의 업적도 공화당원과 국민들로부터 인정받는다. 그가 아니었으면 1930년대의 미국 경제적 암울 기를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또 그가 아니었으면 2차 세계대전도 그렇게 빨리 끝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의 업적이 인정된다.
한국의 수치(?)
한국은 박정희가 세상을 뜬지 거의 30여년이 됐다. 박정희를 과거에 증오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증오한다. 자칭 민주화 인사라고 자화자찬의 중증에 빠진 사람들일수록 그 도는 더 심하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으로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이미 선진국 대열에 거의 들어섰다. 비록 개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OECD 선진회원국에 비하여 많이 떨어지지만 수출수입의 경제규모는 세계 11-12위를 다툰다. 일부 전자품목은 일본을 앞선다. 반도체는 일본을 거의 모든 면에서 제압했다. 조선도 크루즈선 건조만 빼고 세계 제일이다.
이런 경이적 경제발전에 대한 주장을 두고 일부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일본산 부품이 없으면 과연 한국이 어떻게 배를 만들어 해외에 팔 수 있냐고 비판한다. 일본을 추월했다는 말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고 삼성에 의한 소니제국 침몰이라는 말도 과대망상증이라 한다. 전혀 일리 없는 말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도 경제력의 한국이 없으면 엄청난 몸살을 앓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 패배주의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세계가 경탄할 정도로 고도의 성장을 이뤘지만 정치적으로는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이유는 이렇게 비춰진다.
첫째, 남의 업적 절대 인정 안한다. (절대--> 대부분)
둘째, 자기 잘못 절대 인정 안한다. (절대--> 대부분)
셋째, 자신이 잘못한 것도 잘했다고 우긴다.
넷째, 남이 잘한 것 자기 때문에 잘했다고 떼쓴다.
이런 네 가지 요소, 한 마디로 “결과 나쁘면 남 탓, 결과 좋으면 내 탓”이즘(ism)이 팽배하다는 뜻으로 해석 표현할 수 있다.
그럼 미국의 초당적 정치사는 그렇지 않게 나타나는데 한국은 왜 고질적으로 “결과 나쁘면 남 탓, 결과 좋으면 내 탓”이라는 “주의(主義)”가 팽배해 정적(政敵)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업적에 대해 비난으로만 일관하는 데 왜 그러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 남의 업적을 인정해주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는 그릇된 타성적 정치적 사고방식에 젖어 파벌주의의 정당정치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 2년간 미국의 정치적 기념지를 여기저기 둘러봤다. 지난 1월 여행도 그런 곳을 몇 군데 들렸다. 사우스 다코다 주에 있는 “마운트 러시모어”와 일리노이 주에 소재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 생가, 도서관, 박물관이 그 중 하나다. 또 이들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레건 전 대통령이 태어나고 자란 일리노이 주의 탬피코(Tampico)도 눈에 띄어 여기도 잠시 들렸다.
노무현의 기념도서관, 자랑이 될까 수치가 될까?
이 글은 미국의 과거 정치인들의 남긴 흔적을 기록한 명소를 소개하여 한국도 이젠 전직 대통령들이 나름대로의 기념관을 지어 과거의 잘잘못을 떠나 그들 자신의 행적을 방문객들로 하여금 훗날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다.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면 고향에 내려가 기념도서관을 짓겠다 하니 이 글의 의미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더 발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기념도서관이 지어진다면 한국 최초의 전직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된다.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은 성격에 있어서 다른 의미의 도서관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매듭짓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재작년 있었던 인천의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과 같은 파괴적 과격시위나, 혹은 박정희 기념관을 지으려 할 때 과격 좌파들이 기물을 파괴하는 것을 정부가 관망만 했던 자세를 지속해온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기념관이 지어진다면 이것은 노무현의 또 다른 우(愚)가 될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한 의미에서의 기념관 건립이 아니라 지어질 기념관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미화시킬 “미화도구”로 변질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노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후 정 기념관을 짓길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그만 두기 전 박정희 기념관도 지어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청와대를 떠난 후 자신의 기념관 건축에 들어가야 그게 미덕이 되고 노무현의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같이 당리당략을 넘어 초당적 차원에서 과거 지도자에 대한 업적을 인정해줄 수 있는 날이 당겨져야 가능하다.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일궈진 것은 바로 초당적 차원에서 “마운트 러시모어”와 같은 메모리얼 랜드마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못할 게 없다.
여기 마운트 러시모어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여행 중 들린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생가, 도서관, 박물관에 대한 사진을 보고, 또 ‘레건’ 전 대통령이 유년 시절을 보낸 Tampico 타운 역시 사진으로 간략하여 앞으로 건립될 노무현 도서관 건립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글을 통해 유도한다.
Mount Rushmore
올해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231년째 되는 해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으로 시작해 현재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를 맞이해 미국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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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그동안 4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출중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분단된 국가가 아닌 “하나의 미국”을 외치다 남북전쟁을 치른 대가로 흉탄에 죽어간 ‘에이브라함 링컨’을 꼽는다. 다음은 영국에 맞서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독립 국가를 탄생시킨 ‘조지 워싱턴’이 두 번째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며, 그 다음에 ‘악의 제국’이라 일컬렸던 소련연방을 해체시킨 1980년대의 ‘로널드 레건’이 세 번째로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칭된다. 네 번째로는 1930-40년대 경제공황을 극복시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FDR(프랭클린 D. 루즈벨트)’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을 수 있다.
정당(政黨)이 다른 4명의 대통령 상(像)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와 국력의 심벌적 표상인 마운트 러시모어(Mount Rushmore)의 바위산에 새겨진 4명의 대통령 얼굴은 근간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대통령들이 아니다. 잘 알려진 에이브라함 링컨과 조지 워싱턴 얼굴 외에 외국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티도르 루즈벨즈(Theodore Roosevelt, Teddy Roosevelt 라 불리기도 한다)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의 얼굴이 함께 새겨져 있다.
좌측으로부터,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티도르 루즈벨트, 에이브라함 링컨
Picture by cacomfort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3대 대통령이다.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 초안의 브레인으로써 “국민에 의한 정부(Government by the People)"의 초석을 다진 대통령으로 통한다. 티도르 루즈벨트(일명 T.R.)는 26대 대통령으로서 미국을 세계 정치무대(world affairs)로 이끈 장본인이고 1906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탔다. 이 상은 러일전쟁에 대한 평화협정을 중재해 받은 노벨평화상이다. (티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FDR) 대통령과 5촌 지간.)
마운트 러시모어의 위치와 그 역사
1920년대 말 마운트 러시모어가 착공에 들어갈 때 이들 4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출중했던 인물들로 통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얼굴이 바위에 새겨졌다.
마운트 러시모어는 사우스 다코다 주에 위치해 있다. 마운트 러시모어로부터 가장 근접한 도시는 래피드 시티(Rapid City). 현재 인구는 약 8만 정도 되고 이 시티로부터 약 23마일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가장 빨리 근접할 수 있는 메이저 도로는 인터스테이트 90번이 된다.
마운트 러시모어의 인가 동네. Picture by cacomfort
그 유명한 "North By Northwest" 영화가 찍힌 마운트 러시모어
Picture by cacomfort
4명의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마운트 러시모어의 고도는 5,700피트(약 1,737미터), 넓이는 1,278에이커로서 약 150만평. 그러나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이 그리 크지 않다. 얼굴 크기는 높이가 18미터로서 실제 가보면 생각보다 작다.
별로 웅장하지도 않고 또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바위 외에 별 볼 것이 없는데 왜 이곳이 유명하고 또 해마다 200만명 넘은 관광객들이 방문할까? 국가적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의 마운트 러시모어는 국가적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몇 명의 탐사가들이 사우스 다코다 주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구상됐다.
조각가 거츤 보그럼(Gutzon Borglum)
와중 ‘도엔 로빈슨’이라는 사람의 아이디어로 바위에 대통령 얼굴을 새기자는 제안을 1932년도에 냈다. 다음해인 1924년도 ‘도엔 로빈슨’은 유명 조각가 거츤 보그럼(Gutzon Borglum)을 설득해 조각이 들어설 바위가 위치한 블랙 힐(Black Hill)을 방문케 했고, 거츤 보그럼은 바위가 조각에 적당하다는 판단을 내려 조각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블랙 힐의 바위는 본격적으로 “마운트 러시모어”로 불리기 시작했다.
조각가, 거츤 보그럼, Picture by cacomfort
거츤 보그럼은 마운트 러시모어를 자신 생애 최고의 조각상을 만들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 조지아 주의 애틀란타 시티에 위치한 스톤 마운튼(Stone Mountain)에서 이미 소정의 훈련을 거친 베테랑 조각가다. 남북전쟁 때 납부군의 위대한 영웅 ‘로버트 리’ 장군을 스톤 마운틴에 조각하다 그 돈줄이 백인우월단체 KKK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예술조각상에 대한 거츤 보그럼과 물주역할을 한 단체와 이견이 있어 ‘로버트 리’ 장군의 얼굴만 조각한 체 그 단체를 뛰쳐나왔다. 이런 사실을 안 ‘도엔 로빈슨’이 보그럼을 접촉하여 1924년도 마운트 러시모러로 초대했다.
Stone Mountain. Photo by cacomfort. August, 2002. Atlanta, GA.
Stone Mountain. Photo by cacomfort. August, 2002. Atlanta, GA.
이 무렵 미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운트 러시모어를 메모리얼 플레이스로 점찍었고, 조각가로 거츤 보그럼을 작업자로 선정했다. 150주년의 독립기념해가 1926년도였고, 그 다음해 1927년도 조각 착공에 들어갔다.
1934년 조지 워싱턴 얼굴이 새겨졌고, 1936년엔 토마스 제퍼슨이 들어섰다. 다음해 1937년도엔 에이브라함 링컨 얼굴이 들어섰고, 1928년도엔 티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얼굴이 만들어졌다. 2년 후 1941년도 거츤 보그럼은 애석하게 세상을 떴다.
본래 상(像)은 허리까지 조각되어질 예정이었는데 돈이 제 때에 조달되지 않아 얼굴만 조각했던 것인데, 만일 거츤 보그럼이 허리까지 조각하는 일을 진행했었다면 4명의 대통령 얼굴이 다 조각되어지기도 전에 미완성적으로 남아질 뻔한 일이다.
조각에 들어간 총 비용은 거의 100만 달러. 지금은 이 액수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엔 거금이었다.
마운트 러시모어는 모든 미국인들이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1965년도까지 단순한 메모리얼 플레이스였지 국가가 지정한 역사적 유물(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는 지정되지 않았다.
1966년도에 들어서서야 국가의 역사적 유물로 지정됐고, 1991년도에는 조지 H. 부시 대통령이 정식으로 “Mount Rushmore"를 국가적 유산이라고 선언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경작업과 박물관 및 부대시설 건축에 들어갔다. 1998년도 모든 건축을 마치고 새롭게 단장된 마운트 러시모어는 방문객을 맞게 되었고 해마다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에게 역사적 유물에 대한 중요함을 고취시킨다.
미국의 정치 유산이 주는 의미
이곳을 내가 처음 찾았던 때는 1987년도 11월의 20년 전이다. 당시엔 주차장에 무료로 차를 세우고 4명의 대통령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이젠 박물관, 식당, 기념물 스토어 등등이 들어서서 그 자태가 예전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정당 소속을 넘어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 모두가 이곳을 찾는 땐 이념이 따로 없고 논쟁도 없다. 개개인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해서다.
한국도 지도자의 지도력이 뛰어났으면 미국과 같이 그 사람에 대한 정당(政黨)의 이념적 논쟁 요지를 배제하고 인정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노무현의 기념관이 생길 때 박정희 기념관도 함께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노무현이 김정일을 포용하는 것 같이 박정희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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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보다 더 혹독한 쇄국정책을 펴고 인민의 자유를 반세기 이상 억압 착취해온 김일성/김정일 정권도 포용할 수 있고, 한국의 현 경제/외교적 입장을 세계적으로 이끈 미국을 비판할 수 있으면 북한 체제의 잘못된 점도 비판할 줄 알아야 하고, 또 반면 박정희가 잘한 게 있으면 그것도 인정해줄 줄 알아야 노무현이 그동안 정치적 멀티플러럴리즘(Political multi-pluralism)이 한국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것을 전혀 못하는데 김정일 정권만 잘 도와주고 인정해 주면 그게 정치적 배품이고 정치적 미덕으로 착각한다.
지난 달 노 대통령은 말했다.
“미국의 2차 세계대전 후 마샬 플랜을 써서 유럽을 살렸다고 하지만 실은 미국이 훨씬 더 많은 실익을 거뒀으니 우리도 북한은 얼마든지 퍼줘도 손해 볼 게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목에 힘주어 한 말이다. 김정일에게 무한정 베풀어주자는 그 논리 박정희에게는 응용시키지 못한다. 수수께끼다.
노무현이 청와대를 나설 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정치적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된다. 대통령의 자리에 있을 때 할 일을 못하면 영원히 후회한다. 대통령 자리 물러난 후 ‘내가 왜 그 일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면 그 때는 이미 때 늦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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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말했다. 자신이 제일 존경하고 지도력을 본받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에이브라함 링컨”이라고...
일반 미국인들과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링컨이 가장 존경되고 또 그의 신념이 배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미국이 수퍼 파워가 되어 세계의 정치/경제/외교적 대들보가 된 사실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일 중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가 미국과 같은 거대한 국력을 가진 국가로 키워졌다면 과연 그들이 미국이 타국에 베푼 식의 온정을 베풀 수 있었을까?
아마 그들은 20세기의 식민지화를 위해 날뛰었을 것이다. 일본을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절대 믿지 못한다. 러시아? 그들의 과거 행태나 지금 러시아의 푸틴 정부가 하는 “에너지 파시즘” 같은 짓을 보면 그들도 무력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행사를 했을 것이다. 미국같이 베푼 도움을 풀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도 잘못한 게 많다. 하지만 잘잘못은 항상 “비교”를 통하여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 미국은 소련, 중국, 일본의 과거 행적과 비교할 때 인도적 입장을 취한 게 많다. 때문에 미국을 비난하는 사람도 미국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예가 허다하다.
이런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역사로 증명할 수 있다면 믿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은 박정희의 공적(功績)에 대한 인정보다 박정희와 미국에 대한 무의미한 비판을 더 즐긴다. 그것도 개혁이라는 미명하에서 한다.
국민의 생각은 그러나 다르다. 그 어떤 여론조사를 해도 박정희 만큼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노무현도 박정희가 이룬 업적을 김정일에 대하여 무한한(?) 아량을 베풀어주는 정도에서 100분의 1만큼이라도 인정해 줘야야할 때가 아닐까?
이런 생각, “마운트 러시모어”에 서린 미국의 정치문화유산을 통해 한 번 생각해 보았다.
2005년도 “정치의 등불, 링컨과 박정희”에 대한 글을 다른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그 글 여기 소개합니다. 다음은 여행 중 들린 미국의 전직 대통령 발자취를 사진으로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분들에 대한 생각은 각자 편안대로 생각하시고 대신 정치역사가들이 보편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간단히 썼습니다.
로널드 레건 40대 대통령의 생가
로널드 레건이 청년 시절은 보낸 곳 2005년도 8월 여행을 다녀온 후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같은 일리노이 주입니다. 일리노이 주 훨씬 북쪽에 위치애 있는 딕슨(Dixon)이라는 곳인데 고향 템피코(Tampico)보다 훨씬 풍경이 좋고 아기자기한 곳이죠. 딕슨은 로널드 레건을 성인으로 이끈 곳이지만 1월에 본 템피코는 태어나 자란 곳이죠. 사방이 다 밭으로 되었더군요. 여름이라 그 밭이 뭘 심어 키우는 곳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옥수수 밭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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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건 대통령이 태어난 매우 작은 타운. Picture by cacomfort
템피코는 방문은 본래 일정에도 없었던 곳이죠. 물론 지난 번 여행이 어떤 일정을 두고 특별히 떠난 여행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은 여행하면서 그동안 마음에 두었던 곳을 찾아갔던 곳이지요. 때문에 다른 곳은 방문의 의미는 좀 유별난 곳이었죠. 하지만 템피코는 운전 중 우연히 표시판을 발견하여 들린 곳이라 별 기대도 없었고, 또 가보니 레건 대통령이 태어나 어린 소년시절까지 자라기만한 곳이라 볼게 없었답니다. 그냥 “생가”라는 의미가 담겨져 한 20분간 머물며 사진 좀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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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도 다 그랬지만 여기도 눈이 적지 않게 내렸더군요. 다행히 제가 방문한 날은 눈은 내리지 않는 화창한 날이었답니다. 매우 인상적인 날이었는데 여름에 가면 아마 실망감이 좀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레건 전 대통령에 대한 업적은 작년 LA 시미 밸리에 있는 메모리얼 도서관에 다녀온 후 블로그에 따로 다른 글 쓴 게 있고, 또 “한미 대통령의 다른 점”이라는 글을 쓴 게 있는데 이 글 링크만 해드립니다.
2006년도 7월에 쓴 글입니다. “한미 대통령의 다른 점”
허버트 후버 31대 대통령
후버 대통령은 행운과 불행의 대통령이라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한때 ‘보수’의 표상이 되어져 스탠포드 대학에 후버 연구소도 생기고 또 이 연구소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는데 이젠 그 기세가 많이 죽었지요. 사실 또 스탠포드 대학은 공과계통의 업적으로 이름을 더 날리지 폴리티컬(political)한 면에서의 씽크탱크로는 좀 부족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 마당에 미국의 주적(主敵)이었던 소련이 멸망한 후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연구 대상과 목적이 많이 줄어 후버 연구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 위축되었지요. 그래도 로널드 레건 전 대통령은 그의 기념도서관이 스탠포드 대학에 세워지길 정말 갈망했었죠. 하지만 스텐포드 대학 교수들은 결사반대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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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일류대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거의 다 진보진영에 들어갑니다. 하버드, 예일, 스텐포드, 프린스턴, 콜롬비아 등등이 다 그렇죠. 보수는 이들 외의 사립대학에서 더 활발합니다. 공립/주립대학은 진보성향이 강하지요. 그런데 또 묘하게 미국의 대통령은 보수당인 공화당에서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일류대 교수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지요. 그런데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월스트릿이며 경제인들이죠. 미국의 중추 경제는 그 속성상 보수적이랍니다.
후버 대통령이 태어난 곳. 정말 조그마한 집이죠. Picture by cacomfort
침대. Picture by cacomfort
“세금은 적게 내고 국가는 복지부분에 대한 자금 지출은 줄여라.”는 말은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돈 많은 사람들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아이비리그 교수들의 머리 위로 항상 오르려 하니 그 반발심에서 더 진보성향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들 대학교수들이 진보성향이 더 강하다고 해서 경제적 측면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면만 보면 이들도 보수파에 들어가지요. 다만 정치적 면에서 돈 많은 부호들의 입김에서 벗어나고자 진보성향의 정치관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피력합니다.
세금부담과 경제적 파워는 한국도 그렇듯이 미국의 대부호 약 3%가 미국의 대부분 세금을 충당합니다. 샐러리맨들은 자기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국가 운영에 필요한 거금을 낼 수 있겠어요. 그러니 경제부호들은 민주당이 말하는 “경제평등권”에 반기를 들고 대다수 공화당을 지원합니다. 이런 이유로 또 공화당 의원들 중에 부자들이 많지요.
기념도서관 내. Picture by cacomfort
후버 대통령 유년 시절의 교실. Picture by cacomfort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텐포드 대학을 진학할 정도로 학구열도 강했고, 또 머리도 똑똑해 자본주의가 무엇인가를 그 어떤 사람보다 뼈저리게 깨닫고 돈벌이에 그 누구보다 귀신같은 재주를 발휘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금광에 들어가 일했는데 당시 월급이 미국대통령 월급보다 많았을 정도니 후버의 돈 버는 재주 정말 탁월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훗날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될 무렵 시작된 대공황이 미국경제를 파탄시켰고, 그 여파로 보호무역주의가 국회에 의해 발효되면서 국가의 경제는 더더욱 곤란스럽게 되었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FDR) 대통령(하버드 출신)이 집권했는데 하면서 국민에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공공정책을 펴 성공을 거두었지요.
대장간. Picture by cacomfort
여기 모든 집들이 후버 대통령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Picture by cacomfort
만일 경제대공황이 없었다면 루즈벨트(FDR)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었을까요?
저는 “글쎄” 합니다. 우선 FDR 대통령은 소아마비 반신불구자였고, 또 여자와의 염문이 항상 따라 다녔지요. 하지만 당시의 언론은 “남자의 배꼽 밑 일은 입 다물자”는 불문율을 절대적으로 지켜줬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FDR 대통령은 허버트 후버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반사작용으로 더 성공한 대통령으로 될 수 있었고, 또 FDR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뤄 승승장구하니 허버트 후버는 더더욱 실패한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보존하고, 또 메모리얼 도서관과 박물관을 건립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