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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안성기]아이들의 외침을 들어보라 (동아일보)

작은둥지 2009. 5. 5. 10:56
 
[시론/안성기]아이들의 외침을 들어보라 (동아일보2009.05.05)



어린이날(5일)이 85번째 생일을 맞았다. 첫 어린이날의 주인공 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수많은 이가 유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장년과 노년의 고개를 넘었다. 자장면 한 그릇이 큰 선물이고 동네를 순회하는 스프링 말 매달린 리어카 타는 일이 놀이동산보다 즐거운 1960년대. 갖고 싶은 것이 있어 엄마, 아빠에게 졸라도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빴던 부모는 한두 명도 아닌 아이의 소망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다.

충분히 쉬고 맘껏 뛰놀 권리 실종

고가의 게임기나 디지털 기기가 어린이날 선물이 된 지금,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공부 또는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채워주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 재산을 쏟아 붓는다. 성공적인 인생계획표를 작성해 주고 목표를 향해 아이가 잘 달리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의지는 가히 헌신적이다. 그 의지 속에 아이의 소망이 얼마만큼 포함돼 있을지 궁금해진다.

올해는 어린이 권리를 총체적으로 명시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채택 2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 협약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193개국에서 비준돼 가장 많은 나라의 지지를 얻은 국제법으로 인정받는다. 그동안 어린이의 삶과 인권실태는 많이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사회복지 서비스 면에서 큰 개선이 있었다. 건강하게 살아남을 권리나 교육받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 등 이 협약이 명시한 기본적인 권리는 이제 대부분의 어린이에게 절실하지 않은 내용이 됐다.

이 협약에는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결정할 때는 어린이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가 마음에 새길 내용이 아닌가 싶다. 아이의 인생에서 부모가 지원할 몫이 있다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남겨줄 몫도 있다. 아이의 말과 결정이 미덥지 못하겠지만 끝까지 들어주자. 의견이 맞지 않아도 때로는 아이의 의견에 따라보면 어떨까. 스스로의 소신에 따라 한 일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법도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사소한 일 하나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몸만 커다란 어린아이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지구촌 한편에는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말 못하는 수많은 아이가 있다.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간절히 외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고 곁에는 들어줄 사람조차 없다. 국제사회는 매년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를 ‘소리 없이 죽어간다’고 표현한다.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언론이나 국제사회의 이목조차 끌지 못한다. 아이들은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하루 종일 노동을 하거나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총을 들고 싸운다. 이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은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 커진다.

질병-굶주림에 소리없이 죽기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북부 바코리 지방에서 채소 행상을 하는 12세 소녀 자밀라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엄마가 돈을 벌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 다시 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4년이 넘도록 그러지 못했다. 아이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학교에 보내 주세요! 수많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외친다. 우리의 말을 들어달라고. 모든 어린이가 행복해야 하는 오늘, 소말리아 난민촌에서 만났던 아기가 떠오른다. 굶주림으로 어린 생명이 매일 죽어나가던 곳에서 영양실조로 숨질 것 같던 아기는 내 품에 안기자 눈을 반짝 뜨고 웃었다. 나에게 뭔가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 소리를 나는 꼭 들었던 것만 같다.

안성기 영화배우 유니세프 친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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