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 말씀에서 우리 예수님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시편 1편 말씀에도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주님께 속한 참된 성도님은 알곡임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람이 나부끼듯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 때 악한 자는 설 수 없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만, 진정 주님께 속한 알곡은 그 가운데서 견딜 수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장 말씀의 환경이 얼마나 어둡고, 얼마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환경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육체의 힘으로는 설 수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그 어려움 속에서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어려움을 조금도 말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곳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전한 소식이 있다면,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가볍게 오는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주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 어려움이 사도 바울 선생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얼마나 거센 바람이 있는 거친 광야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알곡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피하지 않고 짊어지는 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나아갈 수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4장의 이 내용에서만도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적어도 세 번이나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낙심할만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알곡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비결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우선 바로 주님께 속한 자로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동시에 주님을 진정 사랑하기에 그는 주님을 위하여서 당하는 어떤 것이라도 짊어질 마음이 되어 있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보실 때 참된 알곡이라면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속한 자여야 할 뿐만 아니라, 내 주님을 사랑하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주님으로 인한 그 어떤 고난이라도 짊어질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오히려 주님께 속하여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목숨까지 잃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아니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참으로 주님께 속하고 내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목숨 잃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아니할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에도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사랑치 아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주님 보시기에 참 사랑의 알곡은 나 자신에게 속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늘도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주님께 속하여 내 주님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이들이 진정한 알곡인 줄 압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것이지 우리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4장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다가선 이들에게 주님은 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스스로 최후의 마음의 작정을 가진 이런 마음으로 버티고 있을 그 때 고린도후서 4장은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있는 그 빛을 우리 마음속에 비춰주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가운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러한 가운데 물러가지 아니하고, 이러한 가운데서도 내 주님 사랑하는 그 정함 있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의 사랑의 얼굴빛은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이 빛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우리 마음이 참으로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아니할 수 있고 참으로 더욱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요동하지 않고 잠잠할 수 있는 알곡처럼 흔들림이 없이 이 거센 바람 가운데서 주님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 은총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또한 고린도후서 4장 말씀은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정함 있는 그 마음속에 주님은 생명을 주심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생명이 아닌 예수님을 내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그 자에게 주님은 생명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이 생명은 사실 부활의 생명입니다. 또한 이 생명은 우리에게만 역사해 줄 뿐만 아니라 이런 마음으로 붙드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의 형제들에게도 생명은 역사해 주심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한다는 말씀은 내 속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도 나의 주님을 붙드는 마음일 때 그 부활의 생명은 내 속에 역사하여 주시고, 이 생명으로 섬겨갈 때 마침내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생명의 역사가 있을 수 있음을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명 속에 있을 때 알곡일 뿐만 아니라 또 한편 나의 주님을 이런 마음으로 향하고 있을 그때, ‘믿는 고로 말한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믿음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을 이런 굳은 마음과 정함 있는 마음으로 향하는 그 자에게 오늘도 주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난 이후에 마귀가 밀 까부르듯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그가 부딪칠 큰 어려움일 줄 압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 ‘이제 예수님은 너를 돌아보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너는 주님의 사람은 아니다.’ 얼마든지 마귀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러한 가운데서도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며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왔을 줄 압니다.
이 믿음은 베드로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믿음인 줄 압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이러한 가운데서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는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마음을 갖는 우리에게는 참된 소망이 비춰 와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마음에 가짐과 더불어 소망 속에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가는 줄 압니다.
나부끼는 거센 바람 가운데서도 소망 속에 즐거워하며 견디는 이 자가 진정 알곡인 줄 압니다. 오늘 여러분, 알곡은 주님을 향하여 남김 없는 온전한 마음인 동시에 주님의 붙드시는 은혜 속에 주님과 함께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 온전된 마음으로 매어 달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은혜로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는 문제 많고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사람으로 흔들림 없이 그의 기뻐하시는 알곡으로 서게 될 줄 압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이런 알곡으로 서게 되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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