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리스도와 연합
8. 그리스도와 연합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힘2:11)'
이 글은 전체가 그리스도와 우리가 동등시되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니(히2:14).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히2:16)'
'한 모양으로'라는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요!
주님은 사람과 동일한 성정을 가지셨고, 온갖 본능, 감정, 희망, 두려움을 모두 실제로 공감하시고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이성적인 심령에, 정신적인 요소를 모두 지니셨고, 우리 인간이 가진 온갖 정서적인 감성을 다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완벽한 인성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함께하시니, 주님은 우리 형질의 연약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신성으로 초월적인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으로 해서 이 영광스러운 중요한 진리를 희미하게 생가지 말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들 중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성도을을 주님의 신성에 들어오도록 끌어올리십닏. 진정 주님을 통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어떠함을 믿는 자에게 나누어 주믈,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실제적인 관계에 참예하게 됩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 하라'라고 주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신도 불분명한 가난뱅이 아이가 귀족 가문에 받아들여져, 법적인 아들로 상속자로 양자 입적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소, 고귀한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는 놀라운 말씀으르로 우리가 분명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밀하게 나타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법적으로 그렇게 선언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받아서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형제가 되어, 주님의 인성 뿐 아니라, 주님의 신성까지도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권리를 허락하시고, 우리로 그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곳으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그 영광의 자리에 합한 성품을 갖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하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보시게 될 것이므로
주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온 우주 앞에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모든 땅과 하늘이 보는 데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도 중 아무리 보잘것 없는 자라 하더라도 이로 인해 얻을 위험은 대단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세상이 우리를 오해한다 해도 마음 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국의 어떤 장교가 상위 직급으로 승진을 했는데, 미천한 출신이라 하여 동료 장교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받았답니다.
그들은 저가 미천한 출생이라는 것을 잊으려하지 않았고, 저를 홀대하고 냉대하고 무시했습니다. 저의 사령관인 이 말을 듣고는,
하루는 그 장교의 막사에 들어서서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의 팔을 잡고 다른 장교들의 막사 앞에서 한 삼십 분 정도 걸었습니다.
장교들은 사령관이 지나가자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경례를 했습니다. 물론 사령관과 함께 하던 그 장교도 곁 따라 예우를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령관이 연병장을 떠나자, 장교들은 놀라움과 수치심에 뒤섞인 채로, 사령관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 새 장교를 무시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사령관이 저를 자기 사람이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리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의 형제이신 복된 우리 주님은 땅과 하늘 앞에서 믿는 자의 혈육임을 주장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자의 기도를 보좌에 올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이름을 주님 당신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의 이름이 이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영예를 얻게 하십니다.
영적인 경험에서 하나가 됨
그러나 또, 주님은 영적인 경험에서도 우리와 하나입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를 주님도 동일하게 받으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해야 하 듯, 주님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행하셔야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듯, 주님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듯이, 주님도 교회에 베푸신 구원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신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선구자이신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갈 길을 이미 다 거치셨습니다.
양이 어느 길을 따라갈지라도, 그 길은 이미 주님께서 이전에 거쳐가신 길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는 때로 깨닫기가 힘듭니다.
그리스도는 정말 특이하고도 숭고한 삶을 살도록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묘사되어 있으므로, 정말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즉, 주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삶, 의존의 삼을 사는 온갖 훈련을 다 거쳐야 하셨고,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ㅣ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의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한다.'
라고 하시는 것이비낟.
'아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주님은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령님의 끊임없는 간구에 의지하여 사셨으며, 영적 생활의 모든 어려움들을 실제 겪으셨기에 이 모두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누가 나와 대적하리오. 그러므로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하시리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줄을 앎이라'라고 하시는 선지자적인 모습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바, 시험의 때를 이긴 믿음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경험을 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겪으신 것을 우리도 함께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성화랄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누어 갖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주님의 백서에엑 주시고, 저들로 당신의 거룩한 영 안에서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시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 중에 사시면서, 저들의 삶 가운데서, 주님만의 순수하고 온전한 삶을 새롭게 피워 내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같이, 거룩함이란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것이며, 사람의 영이 예수님의 영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하나이십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은 인간의 온갖 고난을 다 거치셨으므로,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시험다하는 자를 동정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또, 저가 혼잔 고난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고, 동정과 사랑으로 저를 지탱시켜 주고 있음을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더해 주시는 이 동정심을 늘 지니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아픔 하나하나를 몸소 느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휼한다'는 말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동정이 아니라, 함께 겪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지친 심령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주께서 제사장이 되시는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위로의 원천으로 이것을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하나됨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고,
사랑으로 아파하시는 주님의 그 크신 가슴에 우리의 모든 짐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자녀가 아픔을 겪고 있을 때, 그 아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함께 아파할 수 밖에 없음을 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슬픔이 주님의 마음에 아픔이 되며, 주님의 그 고귀한 성정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 이해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고통을 느끼듯이, 사람의 슬픔 하나하나가 그 친구되는 이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듯이, 하늘에 계신 북된
우리 구주께서도 행복한 나라의 지극히 큰 기쁨 가운데 계시지만, 주님의 자녀가 겪는 모든 것을 인하여 함께 아파합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그러므로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무거운 쪽은 주님께서 들고 가시니, 인내하면서 멍에를 지십시다. 하지만 또,
주님은 죽음에서 믿는 자와 하나이십니다.
주님은 당신 몫의 시험을 다 겪었을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겪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인하여 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도록 정하셨음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망으로 말이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주님은 사망이라는 이 마지막 옥의 어두운 문을 지나가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마소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주님은 잔에서 모든 쓴 것을 다 비워 내심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모든 이로 죽음을 맛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잔에도 독사의 이빨에도 독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맛보셨으므로,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죽음이라는 쓴 맛은 지나가 버립니다.
'사람이 나의 말을 지키면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은 오직 복된 우리 주님의 얼굴과 열린 천국 문을 보게 될 뿐입니다.
잔에 담겼던 죽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마시셨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라고 기쁘게 외치게 됩니다.
당신께서 그 검은 것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워 내시매,
이제, 내게는 빈 잔 뿐입니다.
주 예수님! 날 위하여 죽으셨으니,
나 주 안에서 죽었습니다.
당신께서 일어나시매, 내 모든 결박이 풀렸으니,
이제, 내 안에는 당신이 사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영광의 결국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시편8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미래의 권위와 운명을 묘사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영광스러운 권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시8:6)'
그리고 사도는 이것이 말 그대로라면, 이 말씀은 사람 아래 있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실제 관찰한 사실대로,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히2:8)'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이것은 인간의 위대한 머리되시는 인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설명일 것이빈다.
'우리가 아직 만물이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2:8상,9하)'
주님은 당신께서 당하신 경주에서 모든 영예를 취하시고, 인생을 위해 정사의 면류관을 받으시고는, 이를 우리 모두와 함께 나누어 가지십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취하심은 구속을 입은 인생을 위하여 인간으로 그리하신 것이며, 또 주님과 함께 천국에 앉도록 우리를 들어 올리심은
앞으로 세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선대하사,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쓰신 면류관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앉게 하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가지는 높은 영광의 소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가,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나타내심이 되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와 같은 소망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힘을 주며, 말할 수 없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적용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먼저, 바로 우리 믿음의 비밀을 배워 봅시다. 즉, 이 비밀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샘솟듯 솟아나며, 시험중에 믿음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노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말고
복된 안식 속에서 약속 위에 눕기만 하면, 믿음으로 약속에 실려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의지하는 약속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듯이, 믿음도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필요가 생길 때마다, 믿고 승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며 새롭게 주님께 기대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진정한 기도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회중들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송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르시고, 승리의 노래로 기도를 올리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진정한 기도의 영을 알았기에, 기도를 찬양으로, 밤을 낮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믿음의 영으로 내주하실 때는 찬양의 영이 되어 주십니다.
하지만 또 시험중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형제되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겪고 계시므로, 주님께서 견디신다면
우리도 필경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필요 없는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르 불러
견디라 하신 것에는 그럴 만한 필요가 있기 땨ㅐ문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멍에의 다른 끝을 지고 가신다면 제대로 된 것이므로, 우리가 짐을 눌려 내려앉을 일은 없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을 기뻐하게 되고,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넘치는 기쁨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를 아직 온전히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위로를 삼읍시다.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느 모두는 정말 이렇습니다.
현재의 우리보다 강한 것은 정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실 것입니다.
만물은 모두 주께 복종하고, 우리는 저들 위에 관을 쓰시고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시요, 우리의 대표자이시요, 또 다른 우리이십니다.
또, 주님 계시는 그 곳에 우리도 있게 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위를 보시며, 주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이것이 우리의 것이라 주장합시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반원에 불과하지만, 천국이 잇는 저 곳은
이미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지개가 위쪽 반 밖에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보좌 주위를 두르고,
지금은 미완성인 우리 삶의 나머지 반쪽을 다 둘러칠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유업에 들어갑시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보이는 땅을 내가 그들에게주리라'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입시다. 이제 원이 완성되었고,
유업은 한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발 아래 있음을 명심합시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것을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누리해서 취하고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습니까?
주님께 만유의 주로 관 씌워 드리고, 모든 것을 주님의 발 아래 두고, 주님과 함께 발맞추어가면,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한 어려움과 역경 위에 올라서게 되고, 주님의 승천하실 때 타신 마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라고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