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문지기/李天恩 목사님

버려야 할 세 가지 (5)

작은둥지 2011. 1. 6. 14:37

 

버려야 할 세 가지 (5)


이천은(李天恩) 목사님



저는 그때부터 지금 살고 있는 아주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저에게 말하기를 “이 형제는 정말 바보 같다니까, 이런 곳에 살려 하니 말이야.”

저는 말하기를 “이곳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곳에서 제 마음은 아주 평안하고 심령도 매우 자유롭습니다.” 저는 이 집에서 십 수 년을 살았고, 형제자매들이 서로 교제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매일 형제자매들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국내외에 있는 형제자매, 원근(遠近) 각처에 있는 전국 각 성(省)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여 교제하였습니다.


이웃들은 말하기를 “이렇게 낡고 허름한 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 거지?” “사람이든 많이 오는데 양복 입은 사람도 오고, 시골 사람도 오고…” “이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고관대작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뭐하는 사람이지?” “그는 가난한 전도자요.” “왜 모두 그를 보러 오는 것이지?” “그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오. 예수님을 보러 오는 것이오.” 그래서 이 작은 집은 아주 유명해졌고 이웃 사람들에게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에서도 주시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동북지방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들은 저에게 심문하며 말하기를 “모모(某某)씨! 당신 그 작은 집에서 살고 있지 그렇지?” 저는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소?” 그들이 말하길 “벌써 알고 있었지. 당신은 그 작은 집에 살면서 집은 작지만 당신의 명성은 작지 않더군!” 저는 “내가 무슨 명성이 있겠소?

그것은 내가 전하는 예수님의 명성이요.” 그들은 “그래 우리는 이미 벌써 알고 있었어. 당신이 그 집안에서 아주 바쁘더구만! 국내, 국외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당신을 보러 가고, 미국 대통령도 당신과 만나고 싶어했으니 당신 정말 거물이야!” 저는 “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위대한 것이요. 내 몸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대통령이 나를 만나고 싶다 해도 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소.”

만약 이 작은 집이 없었다면 저의 개인의 경험과 간증은 아주 적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집 때문에 적지 않게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많이 생겼었습니다.


한번은 세계 부녀대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는데 대회가 거의 끝나기 전에 당국에서 저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당신 오늘 운이 정말 좋소!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우리가 당신을 이사시켜 줄 것이요.” 저는 “무슨 이사요?”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에게 좋은 집을 준비해 놨소. 방 세 칸에 거실 하나 있는 좋은 집이고 안에 장식이며, 가구도 다 들어있고 당신은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요!”

저는 “고맙습니다만, 필요 없습니다.” 그들이 “당신 정말 바보군. 우리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을 당신한테 준다고 해도 당신은 싫다고 하니 왜 싫은 거요?” 저는 “이 정부에서 왜 저에게 살 집을 준다고 합니까?”


그들이 “사실대로 말하자면 세계부녀 대회가 곧 끝나는데 많은 외국 손님들이 상해로 와서 당신을 보고 싶어하오. 그들이 당신이 사는 이곳을 와서 본다면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소.” 저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의 체면과는 상관없고 그들과 만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온다면 저는 그들과 만날 수 있고 가난한 성도들이 온다면 저는 더 환영할 것이지만, 대단한 사람들을 제가 만날 필요가 없고 집도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 정말 미련해도 더 이상 미련할 수가 없구만.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신청서를 윗선에 제출해도 받아주지 않는데 당신은 준다고 해도 싫다니.” 저는 “감사합니다만 당신이 가서 달라고 하시요!” 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위에서 보살펴 준다고 해도 그 보살핌이 필요 없다고 하니…” 저는 “당신이 보살펴준다면 믿음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셔야만 비로소 믿음직합니다.”


좋은 집에 살면 곧 그것은 미끼를 덥석 무는 것이며 계략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말하기를 “여보시게! 우리하고 같이 좀 갑시다. 예배당에 가서 설교 좀 하시오!” 라고 하는데 제가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안한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의 집에 살고 있고, 곧 저의 약점이 그들 손안에 있게 되는 것이며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혹은 말하길 “당신! 우리 대신 이 의견을 좀 발표하시오! 당신의 신앙은 자유롭다고 국제사회에 선포하시오.” 이렇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작고 낡은 집은 제 자신의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덕을 보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하든지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성경에 따라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여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에 저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지 당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나의 신앙을 위배했기에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당당하며 떳떳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감옥에 가게 한다면 저는 갈 것이고 상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며 내 마음속에 부끄럼이 없고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없음으로 이 큰 시련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작년에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방문 이전에 어떤 이가 또 저에게 물으며 말하기를 “당신! 이제 때가 됐소. 당신 이사하시오!” 저는 “왜 제가 이사를 합니까?” 그들이 “클린턴이 올 것이요.” 저는 “그 사람과 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저는 중국 국민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가 와서 당신을 보고 싶어합니다.”


제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저는 그를 만나겠지만 그가 대통령의 신분으로 온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그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인이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 있는데요! 우리 집 문은 대통령은 들어올 수 없고 성도와 농촌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문이 너무 작아 대통령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말이 안 되오. 당신이 집에 있는데도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위에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제가 “좋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바로 농촌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농촌으로 가서 뭘 하려 하시요? 또 복음을 전하러 갑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그럼 제가 제 딸의 집에 가도 되겠습니까?” 그들은 “그것이라면 괜찮소.” 사실 저는 제 딸의 집에 가지 않고 농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웃이 말하길 “당신 어디 갔었소? 그들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보러 왔는데 집안에 사람이 없더라고요.” 제가 “누가 저를 보러 왔습니까?” 이웃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던데.” 제가 “저는 높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작고 낮은 사람이어야, 성도들이 와야 저는 환영합니다.” 이 시험은 이렇게 또 피하였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만을 누리려 하고 스스로 생각에 ‘대통령이 나를 보러 왔으니 내가 체면치레를 좀 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는 보통사람이 아니야 당신들이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머리 아픈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의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높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우리는 아마 눈앞이 핑그르르 돌 것이고 만약 높은 사람이 우리와 만난다면 아마 우리는 길도 잘 걷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자주 말합니다. “황제가 오든 대통령이 오든 당신은 이곳에 예배 참석하러 온 것입니다. 당신은 작은 형제이며 저기 작은 의자를 가지고 와서 거기 앉아서 들으세요! 예배에 왔다면 당신은 바로 형제이지 황제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당신은 황제이며 제가 당신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황제의 모자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작은 성도가 되세요.” 이렇게 인식하게 됐을 때야말로 진정한 전도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아서는 안 되며 현세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역의 길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육체의 눈으로 본다 해도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세속의 눈으로 문제를 보면 그 순간 곧 유혹을 받게 되고 사탄의 죄의 그물 안에 빠져 마지막엔 결국 불쌍하게 주님께 보고드릴 것도 없는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세상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구하려 함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에서 좋은 것을 구하려 한다면 복음 전하는 일은 하지 마시고 예수님도 믿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인식하고 난 후에는 곧 육체의 인생을 추구했던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손해되는 것들입니다.

저에게 한평생 황제를 하라고 하여도 만약 예수님을 모른다면 저는 여전히 두려움에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엔 세상의 황제도 지옥 속에서 황제가 아니며 죄인입니다.

지옥의 불은 영원히 타오르니 정말로 무섭습니다!

주님께 대한 인식이 확실해진 후에야만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리내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여행자가 되어야 하며 정해진 고향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장막생활을 해야 합니다.

장막생활이 없다면 생명의 길은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재물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공허한 인정을 사랑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믿으심이니 우리는 충성을 다해 주를 위해 쓰고 주님의 재산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집 몇 채에서나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침대에서 잘 수 있습니까? 돈이 많은 것은 정말 죄악의 근원입니다!

마치 제가 말했던 그 자매님과 같이 금괴를 사온 후에 마음속에 평안이 없고, 환경적인 보장도 없어지고, 잠도 평안히 자지 못하고 길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정말로 좋습니까?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그녀가 돈을 내어 놓았을 때 그녀의 마음은 평안을 얻었고 종일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입니까? 금 덩어리는 진짜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 소위 말하는 진짜 속에 고통도 있는 것입니다.

금을 하나님께 바친 후에도 그녀는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았고 입을 것이 모자라지 않았으며 쭉 건강하게 90여세까지 사셨습니다.

만약 그녀가 금을 내어놓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70세까지도 살지 못했을 것이고, 근심하다 그 근심으로 죽었을 것이고, 두려워하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문제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큰 손해를 입을 것입니다.


헛된 명예와 영생의 길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확실히 하십시오.

빈 물건과 가짜 물건은 더 가지고 있어 뭐합니까?

더 이상 그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더 더욱이 다시 그것들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생명이 가치 있는 것이고 또 주님을 위해 진실하고 살아있는 간증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육체를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 우리의 집입니까?

설마 하늘 위에 아직도 집이 없습니까?

만약 땅 위에만 집이 있고 하늘 위에 집이 없다면, 만약 땅에서만 누리는 삶을 산다면 천부께서 “너는 땅 위에서 누려보았으니 하늘의 집의 복은 너의 것이 없다.” 아마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이며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땅 위의 집안에서는 누릴 수 있는 것들도 행복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진정한 안전함이, 진정 보장이 있습니다. 오늘의 근심, 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먼 훗날 우리의 인생의 길을 다가고 나서 천사가 우리를 데려다가 아브라함의 품속으로 데려다 준다 하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충성되고 선한 종이며 내 착한 아들이라.”

우리가 이 한 마디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에 위안이 되겠습니까? 천사가 박수치며 찬미하고 모든 성도들이 우리를 환영하며 말하기를 ”당신은 정말 지혜 있는 자입니다. 당신이 땅 위에서 땅에 있는 것을 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모하였으니 당신은 정말로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주 많은 이론적인 것들을 알고 있지만 장막에 거하는 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장막 속에 제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장막만 있고 그 속에 제단이 없으면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장막에 거하면서 다른 이들이 높은 빌딩에 사는 것을 보지만 자신은 여전히 초가장막에 사는 것만 생각한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 이 길을 저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제 생활이 너무 고되고 제 인생은 너무 가난하여 고개조차 못 들고 다니겠습니다.”

비록 장막 속에 산다 할지라도 만약 제단을 건축한다면 장막에 마음 두지 않고 매일 주님과 교제하며 매시간 주님을 경배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나서는 더 이상 높고 좋은 건물에 살기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물질의 향유를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세상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최고의 것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주 말합니다. “저는 두 시간을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황궁에 가서 반년 동안 향유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요 고통입니다. 청조의 푸이(청나라 마지막 황제) 스스로 말하기를 “다른 이들이 말하기를 황제는 전국에서 제일의 사람이라 가장 행복하다고 하고, 황궁이 인간 세상에서 천국 같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황궁은 저에게 커다란 감옥이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재산이 있으면 곧 향유하는 삶입니까?

높은 관직에 있으면 보장이 됩니까? 조금의 보장도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주님과의 사귐을 바탕으로 뜻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헛된 명예는 진정한 인생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하며 제단이 없는 생활은 영에 속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없으면 주님의 연고로 장막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당신이 아파트에 사니 나도 아파트에 살 수 있다. 나도 능력이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날엔가 당신은 분명히 사탄의 그물 속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제단 쌓는 삶을 산다면 세상으로부터 온 이 모든 것들은 모두다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아파트에 살도록 해주신다고 해도 저는 그 아파트를 흠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일 만약 집을 다시 가져가신다 해도 저는 하나도 아깝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흠모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이틀을 살라하시면 그것은 주를 위해 쓰고 또 형제자매들이 와서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며, 기도하며 찬송부르고 형제자매들을 대접하는 것이 더 편하고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져가신다면 저는 곧 가난해지겠지만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저의 산업이시고 그는 저의 가장 아름다운 고향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분 계시는 곳에 가게 된다면 참 보금자리인 그곳에서 참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하고 아무리 풍요로워도 우리를 유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분대로 일하며, 또한 많은 돈을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주를 위하여 쓰는 것이며, 복음을 위해서 쓰는 것이고,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쓰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이렇게 써야지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비로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떠한 미신이 아니며 모두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한 병을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는데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뭐 별것이었습니까?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이었습니까? 복음과 동등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어디에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태 26:13)


맞습니다. 철저한 헌신이 없는 복음은 효과가 없습니다. 철저한 헌신만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매달고 비로소 대속의 큰일을 이룰 수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가서 영혼을 구하고, 진리를 전파하며, 약한 자들을 돕고 낙심한 자들을 격려하고, 정도를 어기는 자들을 경계하며 실의에 빠진 자를 구원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심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을 사용하시길 원하시고 또한 저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십니다.

“이 옥합은 너무 비싸고 귀중한 것이니까 상자 안에 넣고 꺼내놓기가 꺼려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옥합을 꺼내어 드린다면 나는 끝이야.”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가난한 자니까 향유를 주님 몸에 부으면 너무 아깝다.” 라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참 머리가 아픕니다.


어떻게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제단입니까?

바로 완전하게 철저히 바치는 것입니다.

제단 위에 바치는 것은 소제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번제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것은 자신이 제물을 제단 앞까지 끌고 와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고, 자기 칼로 제물을 죽이고, 자기 스스로 제물의 껍질을 벗겨낸 뒤 제물의 고기를 덩어리로 자르고, 제단의 불이 제물의 고기를 모두 태워 그 향기를 올리는 화제(火祭)이며 이것이 바로 완전하고 철저한 바침입니다.

우리는 이 제단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우리는 장막 안에 거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그 제사의 향기는 이미 퍼져 나와 하나님 앞에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좋은 옷이 하늘을 막았고, 안락한 환경이 하늘을 막았고, 좋은 음식들이 하늘을 막았고, 좋은 집들이 하늘을 막았고, 천장은 너무 두꺼워 기도도 통하지 않습니다. 장막은 하늘을 막을 수 없고 제단을 세우고 나면 그 향기는 바로 하늘로 닿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며, 나그네이며, 장막 안에 살고, 생활은 의지할 곳 없으며, 안정되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믿음직하므로 우리를 향해 나타나 보이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일곱 번 나타나셨는데 모두 어디서 나타나셨습니까? 모두 그가 제단을 세울 때, 장막에 거할 때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아버지라 칭함을 받았으니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분히 친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장막의 생활이 잘 되지 않고 제단 위에 바침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또한 헌신의 기도가 아니며 요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내게 만족시켜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만족하고 나서는 또 장막의 생활이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져버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일입니다.

오직 범사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어나간다면 이것은 그 어떤 세상의 산업을 얻는 것보다도 좋은 것이고, 세상 어떤 일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며, 세상의 어떤 지위보다도 고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어서 깨어나십시오!

명의 길을 가려면 생명 속에 살고 반드시 세상에서 장막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나그네임을 확실히 알고 재산, 물질, 명예, 지위, 공허한 사랑에 당신의 마음을 붙잡히지 마세요. 이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며 가치 없는 것이며 아주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말 것들이며, 지나가고 나서 당신이 다시 후회해봐야 그땐 이미 늦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바로 회개의 때입니다.

성령이 당신을 비춰주시고 간증과 도리와 사실로 당신을 일깨워주시고 계시니 어서 깨어나서 오세요. “주님! 세상은 저의 집이 아니며 저의 집은 하늘 위에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자신을 헌신하여 주님을 위해 살아갈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다 해도 주님을 위해 하고 주님을 위해 살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주님이 증인되어 주십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마시고 조금의 재물에 진리를 왜곡시키고 조금의 허영에 진리를 포기한다니 정말 이것은 너무나 밑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단호히 지키고 주님의 말씀을 꽉 잡으십시오!.

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모두 버릴 수 있지만 오직 유일하게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은 주님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자주 제단을 세우고 주님과 교제해야 하며 주님께 제사드리며 헌신하는 생활을 살면 더 이상은 세상의 높은 건물을 흠모하지 않고 더 이상 사람의

헛된 명예를 흠모하지 않습니다. 장막 안에 거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시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연고로 그곳은 천국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황궁도 지옥입니다. 이 말은 하나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라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 있는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슨 인생관인지 새겨봐야 합니다.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높은 관직도, 많은 재물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심이며 이것이 우리 인생 중에 가장 큰 행복이자 가장 높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생 동안 제단을 쌓고 장막에 거하며, 그는 궁전이 없었고 아주 좋은 것들을 누리지도 못하였으나 그의 생명의 가치를 느낀 모든 이들은 그가 왕자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절대로 다시는 공허한 명예로 인해 눈을 멀게 하지 마세요. 그것은 여러분의 영의 길을 방해하며 여러분의 생명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갑자기 오셨을 때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여전히 재물을 탐하고 허영된 명예를 탐한다면 아마 크고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시키시어 우리를 깨워 주시고 우리로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많은 제사를 드리고 주님과 더 많은 교통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장막에 거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모하지 않으며 주님만 있으면 어떤 것보다도 좋습니다.

우리를 진정한 주님의 친구가 되게 하여주셨으니 그분은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동반자이며 임마누엘이 되어 주십니다. 영원히! 


2 

애굽 세속의 생활을 떠나라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 12장 37~42절)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출 13장 17~18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활규율에 따라 성장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도리를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를 입고 다시 태어나 구원받은 그날부터는 앞으로만 전진하며 멈출 수 없고 더더욱 뒷걸음 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실패입니까?

바로 영혼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새로운 밝은 빛이 없으며 주님과의 사귐을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이때는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설령 아직 큰 죄를 범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더욱이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사귐을 멈춘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새로운 빛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 보시기엔 이미 타락한 것이며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가지 생활의 원칙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동물들은 먹어도 되며 어떤 것들은 먹을 수 없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다. 굽이 갈라져 있으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것과 새김질하나 굽이 갈라져 있지 않은 것들을 너희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 발로 걸으며 날뛰는 곤충들은 먹어도 되며, 땅을 기어 다니는 길짐승은 모두 먹을 수 없으며,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은 먹을 수 있으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들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며 공중에 나는 새들은 모두 먹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휩쓸려가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신앙의 원칙 삼아


땅 위의 동물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 하는 것은 너희들이 먹어도 되지만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 하지 않고 새김질 하나 굽이 갈라져 있지 않은 것들을 너희는 먹어서 안 된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있으며 다른 이들과 같이 나쁜 물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구별된 길을 가려면 우리는 주님만을 추구하며 가야합니다. 이 구별된 길을 가려 한다면 먼저 주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되새김질 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속에는 능력이 없으며 곧 이 길을 잘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는 성령님의 인도아래 생명의 느낌을 따라 사람의 종교적 범위 안에 살지 않고 세상의 굴레 속에 살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상해서가 아니며 우리 스스로가 고결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세상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모든 길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며 그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가기 때문에 그들과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겉으로 볼 때는 구별된 것 같지만 그러나 그의 생각 속에는 아직도 세상과 육체의 속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 가운데서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과 간증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새김질 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마음속에는 조금의 응답도 없음으로 곧 아무런 힘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과 구별된 길에 올랐고 세상의 지위와 세상적인 입장에서도 구별되어 나왔지만 생명은 성장이 없고, 여전히 죽은 듯이 활력이 없으며 심지어는 배웠던 모든 그리스도의 도가 그들의 부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엔 갈 수 없고, 그 말들은 들을 수 없으며, 마땅히 이렇게 행하여야 하고 저렇게 행하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오히려 행하지 못하며 그로 인해 마음속엔 모순이 쌓이고 계속 많은 빚을 지는 느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주님의 말씀을 되새김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이것을 먹지 마라 저것을 먹지 마라 하셨을까요?

왜 이곳엔 갈 수 없고 저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셨나요?

이것이 규율입니까? 이것이 율법입니까? 이것이 규칙입니까?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되새김질과 이런 생각들과 주 앞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 그들이 듣는 말씀과 도리는 그들의 밧줄이 되어 그들을 묶어버리고 죽은 듯 생명의 활력이 없으며 간증 또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은혜 아래 사는 삶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바다 속에 어떤 물고기들은 먹을 수 없고 어떤 것들은 먹을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들을 먹을 수 있었나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은 정결한 것이니 먹을 수 있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들은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까?

겉으로 볼 때 이것이 율법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계시입니다. 신약에서 말씀하시길 “무릇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정결한 것이며 믿음으로 먹는 자는 모두 이로움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 속의 율법은 이렇게 규정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까지도 아직 이렇게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이것은 먹을 수 없으며, 저것은 먹을 수 있고, 안식일을 이렇게 지키는 것이 이롭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보셨을 때 이로운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거나 귀신을 쫓거나 기사를 행하셨다 하여 예수님을 죄인이라 하며 말하길 “너는 죄인이다. 너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며 목숨을 구할 수 있음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율법 속에 살고 있다면 모든 것들이 다 구속이며 억압받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율법 아래에 살고 있지 않고 은혜 중에 있으며, 늘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생활 가운데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형제자매들이라 저는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대로 말을 하면 형제자매들이 저를 제멋대로라 말하며 저를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저를 책망하기 때문에 저는 함부로 마음대로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환경 중에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아 모두 불신자들이면 제 마음은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내가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해도 그들은 교회 사람들에게 말할 일도 없을 것이며 그들은 저를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를 똑똑하다 여김으로 그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얘기하기 시작한다면 이런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는 간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몇 명의 청년 형제들을 데리고 한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 저는 지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 식당 안에는 밥을 먹으려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식당이 꽉 찰 정도이었기 때문에 저와 한 형제는 탁상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형제여! 오늘은 우리 각자 기도를 하고 밥을 먹읍시다.” 라고 했지만 저의 뜻은 그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몰래 그를 주시했었습니다. 그는 제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은 줄 알고는 좌우에 있는 불신자들을 힐끔힐끔 보았습니다. 한참을 보다가 그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훔치고는 아멘! 하고서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형제여, 당신은 기도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저 기도했습니다.” 저는 “당신은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손으로 얼굴을 한번 훔치고는 아멘! 이렇게 하면 다 끝난 것입니까?” 그가 말하기를 “여기 이렇게 사람이 많고 그것도 전부 안 믿는 자들인데 제가 눈을 감고 기도하면 얼마나 창피하고 또 그들은 모두 저를 비웃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기를 “형제여! 방금 당신은 복음을 전할 때 큰 능력으로 말하기를 ‘어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면 다시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당신이 그렇게 담대하게 말했는데 어떻게 이 환경 속에서 밥을 먹을 때 기도하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가 복음을 전할 때는 능력이 있지만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식사기도도 드러내놓고 하지 못하니 이런 그에게 간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능력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의 안은 텅 빈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능력 있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주님을 믿는 자, 형제자매들 앞이나 강대상 위에서는 반드시 큰 능력으로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전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주님 경외하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으니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곧 오늘날 교회의 고질병이 되어버렸습니다.

모임을 할 때는 그렇게도 뜨겁고 그렇게도 경건하고 그렇게도 열이지만 각자의 생활 속에서는 경건함을 찾기가 어려운 모습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며 곧 신앙과 생활은 별개의 것이 되어버리며 가치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것은 율법이며 그것은 사람을 속박하며 사람에게 기준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반드시 5척만큼 커야 하며 만약 5척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쁘게 받아 주시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은 5척 장신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발꿈치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으며 다른 이에게 가짜 신발을 만들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북방인들의 굽 높은 신발처럼 발을 받쳐 더 높이 하여 다른 이들이 보기에 키가 5척이나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상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의 발밑에는 발이 아닌 나무토막이며 그것은 나무막대기로 그를 들어 올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이 길을 간다면 분명히 빨리 걷지 못할 뿐 아니라 만약 그가 달리기 경주라도 한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을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발은 자기 발이 아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