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것 세가지(4)
버려야 할 세 가지 (4)
이천은(李天恩) 목사님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중국의 교회를 은혜롭게 하셨습니다.
몇십 년 동안 우리가 간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어디서든 벽에 부딪혔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만약 육신적인 평안의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중시하는 복음을 전하였다면 권력자들도 우리를 이해하고 환영하며, 사회도 우리를 배척하지 않고, 우리도 역시 편하게 설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어 손을 뻗으면 몇백 원씩, 몇천 원씩 벌어오는데 좋지 않겠습니까?
왜 이렇게 이리저리 구석구석 숨어 다니며 환영도 받지 못하는 말씀들을 전하는 것입니까? 왜 꼭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합니까?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이며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이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전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만 모두 죄인이 아니고 아담에게서 나온 자는 모두 그 안에 죄성이 있으며 그도 역시 죄인입니다.
죄의 문제는 스스로의 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그것을 만회한다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는 내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27절에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생 중 백세 이백세까지 산다 해도 결국은 멸망하고 결국은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사람들을 저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진리를 전하는 연고로 당신이 저를 반대하고 저를 죽인다 해도 저는 아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둘 필요가 없고 그것이면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있습니까?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이런 결심이 있습니까?
삼년 전 기독교인들을 관리하는 종교국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당신들, 왜 예수를 전합니까? 사람들에게 왜 예수를 믿으라 합니까?”
제가 말하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하길 “이것은 당신네들 종교계가 만들어낸 단어 아닙니까? 천국과 지옥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당신은 천국에 가본 적 있습니까?”
제가 “비록 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가 “지옥을 본 적 있습니까?”
제가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서 말씀한 것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믿음으로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가 “나는 100%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제가 “저는 110%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고 저는 유신론자입니다. 당신이 믿고 믿지 않고는 당신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의 영혼을 믿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등처럼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분명히 돌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 받은 자는 천국에 가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지 못해 죄를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자 그는 하하 웃으며 말하길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지옥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나는 산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보았지만 죽은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은 보질 못했소.”
제가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지만 그러나 나는120%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천국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100년을 넘게 산다 하여도 결국엔 죽을 것이며 죽은 후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죄가 있고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당신은 분명히 지옥에 떨어집니다. 지옥의 불은 꺼지지 않고 벌레는 죽지도 않으며 영원히 영원히 고통 받을 것입니다.”
비록 제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아직도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가 “저는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을 구해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제가 바로 오늘 죽는다 해도, 혹 병이 든다 해도, 혹 차 사고로 죽는다 해도, 혹은 당신들이 나를 총살한다 해도, 어떻게 죽는다 해도 나는 무섭지 않고 오히려 매우 기쁩니다. 왜냐하면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고 내가 눈을 감으면 천사가 나의 영혼을 데리고 천국으로 가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몇 살까지 산다 해도 결국엔 죽을 것이고 그날이 와도 천사는 당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며, 마귀들이 당신의 영혼을 데려다가 지옥으로 가서 불이 당신을 태우고 벌레가 당신을 물것이며 영원히 그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손을 떨며 말하길 “정말입니까? 정말 입니까?” 그는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저는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공부를 하지 못했던 사람도 아니고 더 더군다나 당신을 겁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믿어도, 믿지 않는다 해도 좋습니다. 그때가 되어서 당신이 다시 후회해도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별안간 저에게 말하길 “이형!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나 좀 도와주시오! 내 나이가 올해 48살인데 정년퇴직까지 아직 12년이 남았소. 이 12년간 당신이 내 대신 예수님께 말 좀 잘해주시오. 이 12년 동안 내가 함부로 와서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겠소. 예수님께 부탁해서 그 귀하신 손으로 날 좀 받아 달라 해 주시요. 내가 60살이 되어서 퇴직한 후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소.”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 참 잘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탁은 내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인정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속담에 오늘 벗어놓은 신발과 양말을 내일 신을지 신지 않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12년 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체 매우 근심했고 그는 차 한 잔을 마시고는 곧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저는 모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것을 근거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치가 아니며 당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당신이 믿으면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 해도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어떤 사람도 뒤집지 못할 진리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이후에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겁주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사실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결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나의 임종 때에 천사가 나를 데려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니 내가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진실한 간증을 하였으니 그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내 안에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며 텅 빈 이론이 아니고 영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시는 모든 일을 알게 되며 또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만약 이론상으로만 안다면 그 가치는 크지 않고 그저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저는 종종 “신앙은 진실된 생활의 실증(實證)을 통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매우 공허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심오하게 무엇이 있는 것 마냥 절묘하고 출중하게 이야기해도 듣는 이의 영혼 속에 밝은 빛을 비추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의 실제적인 것들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배반하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증거하고 나면 상대방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미 설교 종교(敎)로 변해버렸습니다.
각 지방에 신학교 성경 공부반들이 생겼지만 모든 훈련을 통해 나온 신학생들이 지식은 매우 풍부하지만 각 지방의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 말하는 것이 모두다 이론뿐입니다.
서양의 교회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곳에는 교회가 아주 많지만 모두 설교하는 것뿐입니다. 이리저리 말만하여 진정한 진리의 말씀을 죽은 이론으로 바꿔버렸고 진정한 진리의 말씀을 가짜 이론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개인의 생활 중에 직접 경험하고 겪은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돌봐주시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축복해 주실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또 어떤 결과가 생길는지.”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체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곧 “책 속의 신앙”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며, 교회의 신앙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신앙은 가치가 없으며 종교의 신앙일 뿐, 생명의 진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길은 생명 안에 있고 생활 속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생활 속에서 주님과 연합하지 않고, 주님께 대한 확신이 없고 체험이 없으면 당신의 신앙은 영원히 진리의 영향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당신이 배운 모든 이론과 알고 있는 천국의 모든 오묘한 비밀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면 당신도 금방 당신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오직 진실되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살고 생활을 통하여서 생명을 실제로 증명하는 것만이 비로소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증이 나오게 하며 그것은 누구도 흔들지 못할 것이며 누구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고 제가 예수님을 사랑함이 허망한 것이 아니며 제가 예수님을 위하여 지불한 대가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저의 본분인 것이지 사람이 재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의 임무이며 생명의 본성입니다. 제가 이렇게 행함은 당신과 나의 인생관이 다르고 당신과의 생활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덕을 보려 하고 당신은 포악하며, 저는 손해를 보려 하며 인내하면서 희생하고 버리려고 합니다. 제 생명의 본성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제가 주 예수님을 믿었고 곧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서 행합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 생명의 느낌이다.” 또 생명은 저에게 말합니다. “네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의 인생은 매우 공허한 것이다! 너의 인생은 끝도 없이 까마득할 것이다!”
인생은 공허한 이론이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진실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하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어도, 믿지 않아도 괜찮지만 제가 진리를 당신에게 증거하고 때가 되었을 때 반드시 생명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이런 간증이야말로 능력이 있는 간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진정한 신앙과 들어왔던 모든 말씀이 자기의 생활 중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 행하려 할 때에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을 때야말로 정말로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이 평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약 세상에 나아가 재물을 벌어오고 재산을 늘리고 명예를 얻어도 당신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고, 마음에 혼란이 가득하며, 잠도 평안히 잘 수 없고 밥을 먹어도 편하지 않으며, 기도를 해도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주님의 연고로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을 버린다면 그때야 말로 마음속에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당신을 압박하고 오해하지만 당신이 기도할 때 하늘이 당신을 향해 열리고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시고 당신을 만져 주시고 다독이시며 “아들아! 상심하지 마라. 힘들어하지 마라. 내가 다 알고 있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예수님,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저를 치료해 주십시오. 저의 앞길을 형통케 해주십시오.” 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요 미신입니다. 그것들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 나는 무엇이든지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물질에 의지하여 살지 않고, 인정에 기대어 나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
이것이 궁핍한 것입니까? 비천한 것입니까?
마치 궁핍한 듯하고 비천한 것 같지만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길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이것이 거짓일 수 있습니까?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님이 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매 순간 잡아주시고 저로 그분의 길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십니다.
중국이 개방된 이후에 몇 명의 지체들이 의류 공장과 화학제품 공장 등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찾아 그들을 도와서 공장 책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말하길 “당신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니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 편하게 이 일로 당신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세요. 당신은 바쁘지 않게 한 달에 공장에는 이틀만 나오
시면 됩니다. 월초에 하루 오셔서 일들을 잘 분배해 놓고 복음을 전하러 가세요. 월말에 다시 하루 오셔서 일을 점검해 주시고 장부를 계산해서 벌었는지 손해를 보았는지 점검해주시면 됩니다. 이러면 아주 괜찮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정해진 봉급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영업 이익을 나누는 것으로 합시다. 이 공장의 삼분의 일은 당신의 것이고 삼분의 이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매달 당신의 봉급은 천원, 이천 원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몇만 원 씩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이 돈을 복음 전하는데 사용하시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주님! 저 정말 가난은 충분히 겪어봤습니다. 당신께서 형제들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에게 길을 열어주셨군요. 제 생활에도 이제 의지할 것이 생겼습니다. 이 공장이 저의 방패가 되어주어 제가 복음을 전할 때 궁핍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어려워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괜찮았고 계산해보면 할수록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이 이틀의 시간을 지체한다고 해서 뭐 어떻겠는가!” 하며 모르는 사이에 이 이틀의 시간이 제 마음을 차지해버렸습니다.
제가 계속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 마음속에 갑자기 감사가 막혀버렸습니다. 저는 곧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성령이 제 마음속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남의 덕을 보는 일이 이렇게 기쁜 것이냐? 네가 생각해 보아라 한 달에 이틀 공장에 가고 많은 돈을 가지고 돌아와서 네가 복음을 잘 전하는데 쓴다고 하자. 너는 책임자인데 일을 분배해주고 나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 안심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
너는 사무실의 사람이 믿을 만한지 아닌지도 신경 써야 하며 사업이 손해가 나진 않는지, 물건이 어떻게 팔리고 있는지, 인사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네가 매일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아마 네가 설교하고 있을 때에도 그 생각들로 인해 더 이상 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나의 뜻을 전심을 다하여 준행할 수 있겠느냐?”
갑자기 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주님께서 제 눈을 밝게 닦아 주신 것입니다.
“나의 헌신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달에 28일을 헌신하고 이틀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법은 없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주의 것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주님의 것이며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것이니 나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저는 바로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저는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돈이 적어서 그러십니까? 이렇게 합시다. 이분의 일은 당신 것이고 이분의 일은 우리의 것으로 합시다.” 제가 “당신의 모든 재산을 제게 준다 해도 나는 당신의 요구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가 “왜요?”라고 물었고 저는 “저는 이미 제 온몸과 마음을 주님께 헌신하여 드린 사람입니다. 주께서 제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고 저로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라고 하셨으니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빛을 얻어야 하는데 제가 당신의 공장에서 일할 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온 전심을 다하여서 저를 주님의 손안에 놓고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시든지, 사용하지 않으시든지 그것은 주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드려 헌신하기로 하였으니 저는 제게 대한 주권이 없으니 주님께 저의 할 일을 분배해 달라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관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 일을 거절한 후에 제 딸의 마음은 저와 같지 않아서 저에게 말하기를 “아빠! 아빠! 정말 어리석어요. 우리가 아빠를 따라서 어려서부터 이렇게 가난하게 고생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어쩌다 이런 길을 열어주셨고 형제자매들이 이 일을 도와준다는데 왜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 생각해주시지 않는 것인가요? 아빠가 돈을 다 못쓰면 우리에게 주세요. 우리는 돈 쓸 곳이 많단 말이예요!”
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너희에게 돈을 주시라고 구해봐라! 아빠는 너희에게 줄 돈이 없단다. 나는 그저 주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줄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너희에게 줄 수 있지만 나는 너희에게 줄 돈이 없구나. 나는 대재벌도 아니고 가난한 전도사이며 나의 인생도 아주 고달프단다. 나는 대재벌이 못되는구나.”
그때 저의 작은 딸은 아직 구원 받지 못했고 영혼도 좋지 않았습니다. 딸이 저에게 “내가 아빠 집에 태어나서 정말 재수가 없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오늘은 재수 없다 하겠지만 나중에는 행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은혜를 입고 나서는 저에게 죄를 시인하며 말하기를 “아빠!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아빠! 화내지 마세요. 예수님도 저 때문에 화내시지 않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제가 아빠 집에 태어나서 아빠의 딸이 된 것은 정말로 큰 복이예요.” 그러자 제가 “맞다. 딸아! 너는 물질의 복을 받지 못했고, 세상의 복을 얻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영적인 복으로 너에게 섭섭지 않게 주셨구나! 영적인 복으로 너에게 섭섭지 않게 하셨으니 육신적인 생활의 모자람도 하나님께서 너에게 채워 주실 거란다.” 사실 그러했습니다.
저의 뜻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불쌍하게 하시겠습니까? 더 빈곤하게 하시겠습니까?
더 비천하게 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도(道)를 위하고 신앙을 위하고 진리를 위한다면 아마 핍박을 좀 받을 수도 있고, 훼방을 당할 수도 있고, 안 좋은 말들을 들을 수도 있고, 며칠 동안 죄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그것들은 핍박이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고 죄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로운 것입니다. 제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삶 가운데 주 예수님께서 저를 홀대하신 적이 없고, 저를 손해 보게 하신 적이 없고, 저를 고생하게 하신 적도 없으며, 오히려 주를 더욱더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저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의 길을 갔습니까?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자기의 사업을 버리고 고향을 등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여종들이 형제자매들을 위해 봉사합니까? 모두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나타내 보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 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인도하심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말하길 “주여! 제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게 병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저의 어려움을 가져가 주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셨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것들은 모두 얻었지만 그것은 참으로 영화롭지 못하며 그것의 가치도 높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꾸어 말해서 “주여! 우리의 필요는 그 다음이며, 당신의 뜻이 제일 고귀한 것입니다. 당신의 계획, 당신의 인도하심이 모두 올바른 것입니다. 제가 주님 손안에서 다스림 받을 때 빼앗김과 무리한 대우를 받아도 당신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비교해봅시다.
어떤 신앙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어떤 신앙이 좋습니까?
어떤 신앙이 맞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병을 치료해 주시지 않아 평생 침대에 누워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주시지 않아서 계속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는 나의 주님을 믿을 것이며,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내가 알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것은 옳으며, 모두 정확한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떠나라.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친척과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에 높은 빌딩이 있었습니까?
좋은 일거리가 있었습니까?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에 말하길 “그는 일생을 천막에 살았고 제단을 건축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생애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127세였습니다.
죽은 후에 장사 지낼 곳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그는 은 400 세겔로 헷 사람에게서 장지를 사서 그의 아내를 그곳에 장사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이 영원히 아브라함의 것이며 곧 그의 자손들의 기업인 것이며 곧 이곳이 그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설마하니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면 살 곳이 없겠습니까? 가족이 죽은 후에 장사지낼 곳도 없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허락하셨지만 매일같이 이곳저곳으로 떠다니고 천막에 살며 집도 없었습니다.
성경에 말하길 ; “여기서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시지 아니하고”(행 7:5), 아브라함은 타향에 기거하는 것이었으며 객으로써 여행하는 것이었고 그는 오직 더 아름다운 고향, 하늘 위에 있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만을 간절히 바랬습니다.(참고 ; 레위기11:13~16장) 베드로도 증명하길,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
더 멀리보고 더 높이 보십시요. 이 아름다운 세계는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아한 집과 경제적인 풍족함, 두터운 인정, 모두 우리가 진정으로 누릴 것들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평안이 없고 기쁨도 없으며 더욱이 영원한 가치는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6~20)
또 말씀하시길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이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제 일생의 사역 중에 적지 않은 대부호들과 높은 관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생명은 조금의 보장도 없고, 그 속에는 평안함이 없으며, 기쁨도 없고, 인생의 마지막에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장래에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가는지 모든 것들을 하나도 알지 못하며 종일을 자신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고 재산 문제를 근심하고 명예 때문에 근심하며 마치 매일 매일을 근심하기 위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성도들은 매일같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노래하며, 주님만을 위하고 주님만을 소망하고 주님 이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인생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고 매일 주님을 노래하고 찬미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인생을 비교해보면 하나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근심하며 머리 아파하고 매일을 공포에 떨고, 하나는 아무 것도 없고 지난 끼니를 먹었으면 이번 끼니는 먹을 것이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여 매일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미합니다.
어떤 인생이 좋습니까?
어떤 생활이 가치가 있습니까?
사람은 이런 방향으로 보지 않고 재산의 좋은 것만, 물질의 좋은 것만, 명예의 좋은 것만, 사랑이 좋다 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모두 좋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좋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불쌍합니까? 불쌍하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정말 큰 유혹의 시대입니다.
값진 물건들이 가면 갈수록 풍부해지고 사람의 마음도 가면 갈수록 금전을 탐하게 되고 세상의 신에 마음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진리가 들리지 않고, 정직한 길로 가지 못합니다. 오늘 탐하고, 내일 탐하고, 몇 년을 탐하여도 여전히 탐하기만 합니다. 심지어는 성도들도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교훈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과 같이 탐욕스럽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이 행복입니까? 아니면 재앙인 것입니까?
하나같이 이어지는 정치운동이 가져온 교훈들은 모두 잊어버린 것입니까? 높은 관직에 오르면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아니면 수치스러운 것입니까?
오늘날은 큰 시험의 시대입니다.
많은 물질들이 가면 갈수록 풍부해지고 사람의 마음 또한 더욱더 금전적인 것들을 탐하고 이 세상의 신에 마음의 눈이 멀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듣지 못한다면 정직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치 건망증에 걸린 것 마냥 어제의 일을 오늘은 잊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술이 있기에 마시고 취하며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며, 멀리 보는 사람이며, 하늘에 속한 길을 가는 사람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의 눈도 침침해졌고 돈에 눈이 가려졌으니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고 재물이 있으면 평안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환난의 그날이 언제, 어느 때에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예비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저는 한 CD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종의 설교는 아주 빛으로 가득하였고 또 많은 교훈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성경의 예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의 사회는 칼과 총으로 싸우지 않는 시대입니다. 공포의 시대입니다. 마치 작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사건과 같은 것 말입니다! 큰 건물이 무너져 몇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모두 부자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이런 문제를 논증했습니다.
그가 또 말하길 “이런 이상(異常) 현상들은 하나의 경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국가들에 테러분자들이 있고 그들은 또 더 큰 소란을 일으키려 할 것입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것이 믿음직합니까? 매일같이 불안에 떨며 어느 날 목숨을 빼앗길지 모릅니다. 큰 건물에 사는 것이 안전합니까? 어느 날에 테러분자들이 또 그것들을 폭파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안식처를 찾을 수 없고 안식할 시간도 없습니다. 만약 주님 안에 사는 것과 주님과 교통하는 것을 미리 예비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피난처는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참으로 밝지 못하고 성경의 예언에 대한 이해도 얕으며, 눈에 보이는 물건들만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고, 물질이 좋고 돈이 좋다고 합니다.
환난이 불현듯 다가왔을 때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늦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겁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믿지 못하겠습니까?
성경의 예언은 마치 하나의 망원경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며 우리는 얹혀사는 자 일뿐이며 진정한 우리의 집은 하늘 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기초로 더욱더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며 사실입니다.
그곳에는 아픔도, 눈물도, 상처도, 사망도 없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하늘 위의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년 전 저는 한 과학 잡지에 기재된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북극성 옆에 또 하나의 특별하고 매우 밝은 별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체 망원경을 통해서 보니 그 속엔 생물이 있고 아주 아름다운 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구상의 사람들은 만들지 못할 집이었습니다. 그 생물들은 지구상에서는 없는 것들이었고, 생명력도 아주 강했으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은 문자의 형식으로 그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이 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대체 어떤 이유일까요?” 뒤쪽에는 한 줄의 문장이 더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 같다.” 이렇게 보아하니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올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해낸 것이 아니며. 성경에 쓰여 있고 또한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검증해 낸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세상 사람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의지할 곳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지구상에 있습니까?
이 지구는 기댈 곳이 못됩니다. 어느 날엔가 불에 타 없어질 곳이며, 안전함이 없고, 보장도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지진과 이렇게 많은 재해와 이렇게 많은 테러분자들, 어느 날에 어려움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어려움이 닥친 그날에는 늦은 것입니다.
내 재산을 주님께 드리고,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생활하며 일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뜻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이든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 품에 숨어서 그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고 우리의 굳건한 반석이시며 우리 생명의 보장되십니다.
이 말은 하나의 형용사가 아니며 다윗의 경험과 또한 많은 성도들의 경험이고 더욱이 오늘날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여 우리를 보호합니까?
아니면 권력에 의지하여 우리를 보호합니까?
아니면 주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우리를 보호합니까?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다면 가물가물하게 보지 말고 또 잘못 보지도 마십시오.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경제적인 것을 허락하신다면 절대로 그것들에 의지하여 우리 인생의 보장을 삼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돈이 많아져서 한평생을 누릴 수 있겠구나.”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무지한 자야! 오늘밤 내가 너의 영혼을 원한다면 너의 돈을 무엇에 쓰겠느냐?”
저는 또 말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은 절대 그저 이론이 아니며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깨닫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가운데 환난 속에 빠졌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리고 맙니다.”
장막에 거하고 제단을 건축하는 생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안정된 생활을 구하지 않았으며 매일매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장막 안에 거하기를 기꺼이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장막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다음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단을 건축하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그리스도인의 진정 올바른 인생이란 ; 장막에 거하고 제단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가 장막 안에 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곧 땅위의 재물의 풍부함을 다시 좇지 않으며 또 다시는 육체를 위하여 계획하지 않습니다.
장막 생활을 한다면 아주 쉽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이 있다면 다시는 세상에 의지하지 않고, 재물에 의지하지 않으며 인정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온전히 주님의 계획하심에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이 저에게 계획하신 것이면 저는 재물을 쓰고 또 주를 위해 씁니다. 주님이 저에게 계획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주님께 강요하지 않으며, 제 몫을 다하여서 생활하며 제 몫을 다하여 일을 하며, 그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으며, 입을 옷이 있고 먹을 밥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일을 맡기시고 더 큰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세상 유혹에 빠져서 눈을 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주를 위해 살아야 하며, 깨어 주를 위해 먹고 마셔야 하며,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풍요롭게 하시면 저는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저의 먹을 것, 입을 것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 풍요로움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복음 사역의 필요에 쓰며, 어려운 동역자들을 위해 쓰며, 거룩한 일을 하는 곳에 씁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대가를 지불하고 투자를 하여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이 투자는 절대로 손해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 세상 사람에게 투자한다면 아마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영혼을 구하는 것에 투자하고 하나님을 위해 투자한다면 이 투자는 정말 성공한 투자인 것입니다! 지금 생애와 내세에 모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형제자매들의 눈이 흐려져서 보지 못하지만 잘못 투자하고 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제가 앞서 이야기했던 그 형제와 같이 스스로의 생각에 집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여 현재 자신에게 돈이 필요하니 드렸던 것을 다시 가져와 팔아버리고 사업을 하여 다시 큰돈을 벌고자 하였습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재산입니까?
당신이 팔아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팔 수 있지만 돈을 벌 수 있습니까?
권력은 당신의 손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당신이 그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말리시지는 않지만 돈을 벌고 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바쳤던 것을 다시 가져와 돈을 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본전마저 날려버렸습니다. 이제야 내가 틀렸다는 것을 겨우 발견하였습니다. 잘못되었음을 하나님께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하여주시지만 손해 난 모든 것은 일생 동안도 채울 수 없으며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집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바쳤다면 아주 좋은 교회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길과 골목 곳곳의 구걸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노동자들과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모두 권고하여 주님을 믿게 하고 그곳에서 모여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집을 다시 가져가 우리는 할 수 없게 되었고 이 계획은 실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드리려 하지 않고 순종하려 하지 않았기에 결국 그는 재물을 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본전까지 잃어버렸고, 그는 돈을 가지고 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에게 부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본전을 잃고 또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한 차례의 경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