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문지기/묵상(강영기목사님)

순례자의 묵상(9)

작은둥지 2008. 5. 10. 16:21

2008. 5. 10 (土)                       순례자의 묵상 (9)


         어찌하여 우느냐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내일이 없는 울음이었습니다.
물론 오늘 여기까지는 울면서라도 달려왔지만
이젠 아무 것 없는 진정 나 전체를 잃은 것 같은 눈물입니다.
전심으로, 남김 없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그것도 원하여 따랐던 내 주님이었기에
이젠 그 모두가 사라져 버린 눈물인 것 같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정말 하고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여기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처음 주님은 “마리아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여자여”라는, 즉 주님은 자신을 숨기신 채,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보다 그 눈물의 의미를 물으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일로 울 수 있습니다.
문제의 귀중성은 이곳에서 우는 눈물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실 때 주님은 그 눈물에 응답하시어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22절도
주님을 상실한 이 진정한 눈물에는 주님은 만나주실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의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문 닫고 또 문 닫고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고 슬픔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 부활하신 그 영광스런 예수님은 나타나 주시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기름 회사의 중역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정말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직하고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가에 통나무가 쌓여 있는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후일에 그가 “새 포도주”(The New Wine)란 책에서
그때 주님을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인지, 왜 우는지 아시는 줄 압니다.

창세기의 하갈의 눈물도 주님 그리워 찾는 눈물이 아니고요,
창세기 23장의 아브라함의 눈물도 주님 찾는 눈물이 아닙니다.
창세기 45장의 요셉의 눈물, 창세기 46장의 요셉과 야곱의 눈물,
우리 눈에도 곁에서 그 사실을 알면 함께 울 것 같은 눈물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이 눈물에 대한 질문에
주님께서 직접 “마리아야”라고 나설 수 있는 눈물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떠나가신 주님 얼굴 뵙고 싶어서 울었다는 기록은 성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생생히 주님 얼굴을 뵈옵듯이 기쁜 얼굴로, 힘 있는 얼굴로
마치 주님을 뵙고 난 후의 막달라 마리아가
기쁨에 찬 얼굴로 형제들(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이 힘 있고 소망에 가득 찬 소식을 온 기쁨으로 전하듯이 전하였음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것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이 짙고도 순수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진정한 숨겨진 눈물 없이는
이런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없고요,
그렇게 확신과 기쁨에 찬 소식은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이 다음날 아침 저는 다리로 걸어도 그 얼굴이 빛나는 것은
지난밤 강변에서 무슨 일 있었던 것 틀림없듯이
오늘의 주님 모신 복됨으로 밝음에 가득 찬 당신의 모습이라면
당신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답할만한
주님의 무덤가의 일이 지난밤에도 당신에게 틀림없이 있었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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